김교영 옹, 만세운동 주도자로 지목 '옥살이'

#법원 판결문과 김교영 옹
아들 부부도 친일파에 붙잡혀 온갖 고문 당해
1919년 서슬 퍼렇던 일제 당시, 3월1일의 아침이 밝자 전국 곳곳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 만세 합창이 있었던 시대에 부자(父子)가 광주(현재 하남)지역과 남양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한 역사가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였던 故 김교영(1858년생) 옹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아 옥중생활을 해야만 했고 아들 김정하씨 역시 가족이 친일파에 붙들려 몰매를 맞는 등 고통을 받는 아픔을 겪었다.
교차로저널은 제88회 3.1일절을 맞아 조국의 해방을 염원했던 하지만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져야 했던 독립투사 김교영 옹을 중심으로 3부작에 걸쳐 당시 상황을 재 조명한다.
#총부리에도 꿋꿋했던 우리의 할아버지
고 김교영 옹은 1857년 3월, 당시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 구산(광주군 망월리와 서울 하일동 경계의 작은 부락이름)에서 경주김씨 계림군(鷄林君)파의 1대손인 김 균(조선 개국공신)의 18대 자손으로 세상의 첫 빛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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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는 김교영 옹의 증손자 김학철씨 | ||
다음날 27일에도 자신의 장남 김정해씨, 차남 김정숙씨, 3남 김정수씨, 5남 김정필씨를 대동하고 마을주민 수백명을 모아 구산에서 20km쯤 떨어진 동부면사무소(하남 천현리)로 돌진 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기세에 밀려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도망갔고 한참동안 만세를 부르던 군중은 신장리 장터를 거쳐 황산(하남 풍산리)고개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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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영 옹은 훗날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 ||
다급해진 왜병들은 총을 쏘며 대항했고 이 때문에 시위대는 흩어졌지만 시위를 주도한 김교영 옹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다 조카사위인 권명규씨와 함께 현장에서 체포됐다.
또, 곧이어 조카인 김정운씨도 함께 체포 돼 이들은 남한산성으로 끌려 가 거꾸로 메달림을 당하고 손가락에 대나무를 끼고 비트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한다.
권명규씨와 김정운씨는 태형 60대와 벌금 5원을 내고 석방됐지만 김교영 옹은 서울로 압송 돼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인 금천광길(金川廣吉)로부터 징역 1년6월을 선고받는다.
당시 법원은 피고 김교영 옹이 주민들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며 조선독립 시위운동에 찬동 해 정치변혁의 목적을 이루려 했다고 판시했다.
형기를 모두 마친 김교영 옹은 복역 중 발병한 병으로 3년간 고생하다 1923년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66세(1923년)의 일기로 결국 생을 마쳤다.
3.1절 당시 하남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교영 옹은 독립운동가로서 인정받아 지난 1994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아버지 뜻 받들어 대한독립 목터져라 외쳐
김교영 옹이 하남지역에서 3.1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면 김교영 옹의 4남인 김정하(당시 29세)씨는 남양주와 양평 등지에서 부친의 뜻을 받들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김정하씨는 1919년 2월 10일, 당시 양주군 와부면 조안리에 있는 왜병파견소를 청년들과 함께 습격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또다시 와부면 덕소리에 있는 헌병파출소를 습격하다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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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 됐던 김정운씨의 손자 김학령씨 | ||
날이 저물었지만 독립만세의 외침을 저녁까지 계속됐고 횃불을 든 주민들 중 여러명이 왜병에 체포됐지만 다행히 김정하씨는 피신할 수 있었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정하씨 부부는 친일파들에게 붙잡혀 모진 몰매를 맞아야 했고 왜병에게 신병이 인도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탓인지 이번에도 김정하씨는 친일파들의 소굴에서 탈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하씨 부부는 몰매를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만신창이 몸으로 평생을 고생해야만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규웅 기자 aa5767@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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