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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 달라, 담배 한 갑 건낸 적 없다”캠프 콜번 45년 근속한 박지훈씨

[하남] “지난 45년 동안 근무하면서 잘 봐 달라는 뜻으로 담배 한 갑 선물 한 적도 없지만, 그 들은 계약기간이 끝날 시기면 반드시 개별면담을 통해 내가 한 일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려줬으며, 열심히 일한 나는 당연히 매년 채용계약이 연장돼 왔다”

“일반 한국사회에서는 40대가 되면 회사에서 쫓겨 날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나는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열심히 일하면 일 한 만큼의 대우를 받았고 그러한 일에 대한 헌신도는 냉정하고 옳 바르게 인정 받아, 60살이 넘은 지금도 일 할 수 있도록 배려와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 10월 9일 있었던 하남시 상산곡동 미 304통신대 캠프콜번 기지 폐쇄식 행사장에서 미군부대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박지훈(65.하남시 신장동)씨의 말이다.

황해도 은율이 고향인 박씨는 지방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 났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공산당들에 의해서 지역 반동분자 집안으로 몰려 집안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씨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맨 몸으로 남한으로 탈출했다.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도 없이 남한 땅에 도착한 박씨는 하루 아침에 바뀐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게 됐다.

북에서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남을 도와 주면서 살다가, 남쪽에서는 얻어 먹고 사는 처지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도 해 봤지만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넝마주이 부터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인생 밑바닥 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한 고생스런 삶을 살아가면서 박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같은 동포들인 주의 사람들의 냉대와 차별과 편견이었다.

가난하고 도와 주는 친인척 한 명도 없는 자신을 바라 보는 이웃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으며, 박씨는 말 할 수 없는 수모와 온갖 인격적인 모독을 당해야 했다.

한국인이지만 같은 한국사람으로서 대접 받지도, 보호 받지도 못하는 슬픈 시간들이 박씨를 감싸고 있던 와중에 미군부대 들어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군속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저가 하는 일이 전문적이며 높은 지식을 갖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캠프콜번에서는 매년 직속상관이 나에 대한 근무평정을 하는데, 책상에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하는 방식으로 민주적이며 합리적으로 평가를 진행했다”

“지난 45년간의 미군부대 캠프 콜번의 생활을 뒤 돌아보면, 이곳에서는 신분이나 계급 또는출신에 의해서 사람을 깔아 뭉개는 것이 아니고, 저와 같은 보통의 사람도 무시 받지 않고 인격적으로 존중 받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고 박씨는 강조한다.

45년의 세월속에 자신의 청춘을 모두 묻은 캠프 콜번이지만 박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이별의 아쉬움이 아니고, 캠프 콜번에서 있었던 최선을 다한 지난 세월과 그 속에서 자신이 인격적으로 인정 받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미군들이 한군에 와서 통일이 안됐다는 등의 말들이 있지만, 저는 소 시민으로서 그러한 정치적인 내용들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남기고 싶은 말은, 밑 바닥 인생에서 허덕대면서 헤메고 있던 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양성시켜 준 것은 캠프 콜번이었다”고 박지훈씨는 회상했다.

캠프콜번이 문을 닫고 박씨는 다시 성남쪽의 미군부대로 옮겨서 직장생활을 계속하게 됐는데, 박씨는 그곳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일에 충실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 들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공정하고 합당한 보답을 해 주기 때문이다”는게 박씨의 설명이었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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