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주먹밥’ 먹으며 한 없는 눈물
전쟁 후 첫 미사에서 고해성사로 참회
<인민군 징집 소식 듣고, 단신으로 월남>
“지금도 기도 할 때 마다 6.25전쟁 때, 사천전투에서 죽은 적군과 내 자신도 모르게 죽었던 사람들을 떠 올리고 기도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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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당시, 강원도 사천전투에서 생사의 기로를 경험한 최경린 옹 | ||
정식 군대훈련도 받지 못하고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생사를 넘나 드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최옹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 봤다.
평안남도 대동군 동암면 도전리가 고향인 최옹의 집안은 동네에서 소문난 부자집 이었다.
2차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 했으나, 북한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득세 하면서 최옹의 집안을 ‘반동분자’로 몰리기 시작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점과, 잘 사는 소위 지주계급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집안의 아는 분으로부터 “너는 곧 인민군으로 징집 당 할 것이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 1948년의 일 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옹은 부모와 형제를 떠 나서, 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왔다.
남한에는 아는 친척이 몇 분 계셨지만, 방 1칸에 몇 십 명이 웅크려 자는 모습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서부청년단’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게 됐다.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집안이 고통을 받고, 자신도 홀홀 단신으로 남한에 내려 와 있는 데 대한 분노와 반발이 컸으므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서부청년단’은 최옹에게 식사문제도 해결해 주고,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도 일치했던 것이다.
<서부청년단 가입과 국군 입대>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모든 정치단체를 해체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최옹이 소속된 서부청년단에 소속된 2천여명의 단원들은 1948년도에 일제히 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 영등포 경기방직 자리에 있던 육군포병 야전포병대에서 기본 훈련을 받고 강원도에 있는 18대대 제1포대에 배치돼 2년여의 군 생활을
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맞게된다.
갑자기 비상나팔 소리가 들리고 완전무장을 해서 이동한 곳은 강릉 인근의 압목 이라는
바닷가 근처의 야산 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둥지둥 적의 동태를 살피는 동안에 하루가 지나갔고, 잠깐 잠깐 보여주던 적의 움직임이 다른 목적을 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루가 지나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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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부족으로 포대의 위치가 적군들에 의해서 훤히 노출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곧 바로 날아 든, 적의 집중 포탄을 맞고 많은 희생을 치른 뒤 였다.
처음 당하는 포탄의 굉음과 비명소리, 전우의 시체……
날이 어두워 지면서 철수명령이 내려졌고, 포대는 허둥지둥 백사장을 빠져 나와서 당시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사천국민학교 뒤(현 강릉시)에 포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의 곡사포 사거리는 수백Km 였지만 최옹의 부대가 가지고 있는 105mm 곡사포 사정거리는 고작 8Km 였다.
적군이 사정거리내로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포를 했지만, 포병들의 위험은 그 만큼 높았다.
26밤 부터 새벽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포탄을 다 사용했다. 북한군도 아군의 포 발사위치를 파악해서 금새 적 포탄이 아군 포대를 향해서 날아 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통스러운, 포탄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 오는 소리, 고막이 터 질듯한 아군의 포 발사소리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러기를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적군과의 첫 대면, 그리고 실탄 발사...>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 하면서 멀리 들판이 보이기 시작 했는데, 그 들판의 숲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적이다”라고 외쳤다. 얼마나 위장을 잘 했는지 마치 숲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와 잎으로 철저히 위장을 한 적군은 1열 횡대로 구성돼서 1진이 일제히 앞으로 뛰어 나와서 곧 엎드리고 있으면, 다시 2진이 뛰어 나오고, 다시 3진, 4진……끝이 없었다.
적이 너무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에 곡사포를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없어서, 곡사포의 각도를 최대한 눞혀서 직접포격에 나섰다.
급작스런 포 사격에 적군들이 쓰러지고 주춤하고 있는데, 아군의 포진지 뒷산에서 기관포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오면서 적군들을 향해서 총탄이 내리 꽂히고 있었다.
보병부대가 후퇴 하면서 일부 남겨둔 기관총사수가 아군을 돕기 위해서 기관총을 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옹이 속한 부대는, 물 밀듯이 들여 닥치는 적 보병부대를 상대 하기는 숫자와 경험면에서 역부족 이었다.
죽은 전우의 총 들을 모아서 한 군데 모아 놓고, 적군이 최대한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죽기를 각오하고 이미 군번줄을 모아서
땅에 묻어 놓은 상태여서, 마음에 미련은 없었다.
뽕나무 밭에 몸을 숨기고 적을 기다렸다.
20여미터 앞에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방아쇠를 당기자 적군은 쓰러졌다.
한명, 두명, 세명, 네명, 다섯명……
그런데 더 이상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구식총으로 5발 밖에 장전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 때 뒤에서 분대장인 김로제 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포 조준대를 가져와라. 포를 파괴해야 한다” 분대장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2개의 조준대가 있는 곳을 기어 가는데, 몸 좌우와 발밑에 총알이 빗발치고 있었다.
이미 목숨은 하늘에 맡긴 상태였고, 반 정신이 나간 순간 이었다.
겨우 조준대 1개를 회수하고 나서 생각해 낸 것은, 낮에 큰 도움을 주던 산 꼭대기에 있던 기관포였다.
기관포를 쏘면 적군을 다 없앨 수 있는데, 잠깐 발사되던 기관포가 조용했기 때문 이었다.
다시 죽기를 각오하고 낮게 기어서 산으로 올라 기관포가 있던 곳을 찾았지만, 아군 기관포수는 이미 죽어 있었고 고장 난 기관포는 땅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서히 아침해가 밝아 오면서 산 위에서 아군의 포진지를 내려다 보니, 이미 적군에 의해서 점령을 당한 뒤였다.
<피 묻은 주먹밥 먹으며 한 없는 눈물>
밤새 사경을 함께 헤매던 전우들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 보던 최옹이 발견한 것은 어느 민간인 아저씨가 주먹밥을 지게에 진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숨을 거둔 지 오래 됐는지 피는 엉켜 있었고, 피 묻은 주먹밥들이 주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25일 저녁을 먹고 난 후 27일 아침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있었던 최옹은, 피 묻은 주먹밥을 손에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비록 피 묻은 곳을 손으로 털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목 부상부위를 만지면서 이미 손은 피로 적셔져 있어서 자신의 피와 주먹밥이 엉킬 수 밖에 없었다.
‘피 묻은 주먹밥’을 먹으면서 죽어 쓰러진 동료들의 생각에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겨우 허기를 면하고 적과는 반대방향 쪽으로 방향을 정해서 내려오니, 다행히 아군들이 있어서 합류하게 됐다.
이제 6.25전쟁이 끝 난지 55년이 지났다.
그러나 최옹에게 있어서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 후 첫번째 성당 미사에서 신부 앞에서 그가 한 고해성사는 “사람을 죽였다”였다.
고해성사를 들은 신부는 “군인으로서 명령을 따라야 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다”면서 위로의 말을 남겨 줬다.
그러나 사람을 죽었다는 마음의 가책은 평생 최옹을 따라 다니고 있다.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
“지금도 매일 하는 기도 중에, 전쟁 당시 내가 죽인 적군과 포 사격으로 죽은, 이름 모를 사람들에 대해서 참회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 하는 최옹의 표정은 숙연해 진다.
2000년도에 맑은 공기를 찾아서 하남시로 이사 온 최옹은 몇 년전 부터 작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하남시청을 찾아가서 봉사할 수 있는 일자리를 문의 했더니, 처음에는 현관에서 민원인 안내역을 맡아서 했지만, 지금은 차량운행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홀로 사는 독거노인들의 집을 방문해서 무선페이징(위급시 비상벨)을 점검하고 고장 난 페이징을 회수해서 수리의뢰하고 다시 반환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젊어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로 무력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쟁기술과 전쟁무기가 발달해서 6.25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전쟁은 서로 죽는 것 이므로, 될 수 있다면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최옹은 말한다.
1991년에 사천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격전지였던 사천국민학교 뒤에 ‘강릉지구포병전공비’가 세워졌으며, 매년 6.25를 맞아서 살아 남은 당시의 전우들과 만나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경험하지 못해서 자기 목소리만 높이고 있지만, 전쟁 나기 전까지 3년간 평안남도 고향에서 경험한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는 잊지 못합니다”
“여행도 맘 대로 못 가게 하고, 3사람 이상 모이지 못 하게 하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좋다고 말 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최경린옹은 말을 마쳤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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