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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둘겨라, 그러면 열리게 된다”<저널초대석>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임계순 회장

33년전 50만원으로 미국 건너가 대 성공
하남시-리틀락시 자매도시 성사에 기여


하남시는 미국 알칸사주 리틀락시와 유일하게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당시 두 도시간의 자매결연을 성사 시키는데 주인공 역할을 했던, 리틀락시에 사는 재미교포 임계순씨(남.59세)가 지난달 21일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제19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180만명의 회원수를 자랑하는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선거에서 고작 500여명 정도의 한국교포들이 살고 있는 조그만 도시 리틀락의 임계순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이유는 무엇일까?

21일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곧 바로 한국 기관의 초청을 받고 고국을 찾은 임계순 회장을 만나서 강인한 집념과 의지로 점철된 그의 성공 스토리와 리틀락과 하남시와의 인연을 들어 보았다.

 

   
▲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에 선출된 임계순 회장
지난 21일 미국 애나하임시의 디즈니호텔에서 있었던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에서 과반수이상의 득표로 임기 2년의 회장으로 선출 된 것을 축하 드린다.

저가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에 갑자기 나타나서 회장이 된 것은 아니다.

지난 1992년 알칸소 한인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9년에는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부이사장,  2003년에는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수석 부회장직을 맡아서 일해 왔었다.

지난 해에는 알칸사주에서 수여하는 ‘주 최고 성공 경영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신의 성공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진정한 돈은 값 지게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투기 사업으로 10억 또는 100억을 벌었다는 것과, 자신의 노동에 의해, 자신이 만든 상품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전 세계인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서 100억을 벌었다는 것과는 가슴에 와 닿는 느낌부터 분명 다르다.

많은 미국교포들이 한국을 와 보고 크게 놀랐다는 말 중에, “부동산 땅 값이 올라서 몇 십억원, 몇 백억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미국에도 빈부차가 있지만 한국처럼 심각하지는 않고, 미국에서는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살아 갈 수 있도록 사회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 임회장의 생각이다.

“투기등에 의해서 돈을 버는 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고 본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임계순 회장.

   
미국에는 어떠한 계기로 건너가게 됐으며, 무슨 일들을 했는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임계순회장의 부모와 형제들은 막상 남한으로 내려와 보니, 일가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온 식구가 빈곤한 바닥생활을 체험하게 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야간으로 졸업한 임계순씨의 이력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집안이 어렵다 보니 초등학교시절에는 신문배달을 했고, 중학생때 부터는 청계천에서 리어카에 좌판을 벌여 헌책을 사고 파는 일에 뛰어 들었다.

남 달리 사업수완이 있고 영특해,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미 청계천 헌책방 상가의 한 모서리가게를 자치해 어엿한 책방주인이 되어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건국대 경영학과에 복학하고 나서 고민을 시작했다.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갚가 고민의 중심에 있었다. 마침 미국에 가 있던 큰 형님이 보내준 장난감 완구류로 가득 채워진  박스 한개가 도착했다.

이 완구제품을 보고 섬광 같이 스치는 아이디어를 붙잡고 제품 만들기에 나서, 만든 회사가 왕십리에 공장을 둔 ‘아폴로 완구 공업사’였다.

지금의 40-50대 나이라면, 당시에 꼭 한번은 사야 했던, 장난감 총에 콩알 크기의 플라스틱 총알을 넣어서 쏘는 장난감인데,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 이었다.

이 사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대한민국을 석권하는 것 만으로는 그의 목표가 채워지지는 않았다.

임계순 회장은 자신의 나이 27살 되던 19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의 목표는 “내가 만든 상품을 전세계를 대상으로 판매해 보겠다” 였다.

둘째 형에서 아폴로완구공업사를 간단히 넘겨 주고 단돈 50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미시시피에 도착했다.

영어도 서툴고 미국문화도 모르기 때문에 9개월 동안 직장생활을 해서 모은 돈으로 600불 짜리 중고 자동차를 구입했다.

평소 미시시피 시가지에서 유난히 장사가 잘 되는 옷가게를 눈 여겨 봐 오던 임계순씨는, 신중한 검토를 해 나가고 마침내 의류 판매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사업자금이 없었다.

 

   
<두들겨야 열린다>

미시시피시내에 있는 한 은행을 찾아가서 은행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지금도 교제를 유지하고 있는 윌리암 이라는 당시 지점장은 5천불의 신용대출을 요청하는 임계순씨의 재산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은행 거래실적 없음’ ‘보유재산 600불짜리 중고자동차 1대’가 임씨의 전 재산이었지만, “나에게 5천불을 빌려주면 평생 후회 하지 않을 것이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임계순씨의 열정에 이끌려, 지점장 여신재량권내 금액인 5천불이 은행구좌에서 임씨의 구좌로 옮겨졌다.

막상 옷가게를 차린다고 했지만 5천불로는 가게 구하고, 구색 맞춰서 옷을 진열하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성수기인 성탄절을 앞두고 가게 진열장의 10% 밖에 물건이 채워지지 못했고,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두들겨야 열린다’는 말처럼, 누군가가 “뉴욕에 가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믿고, 2천불을 손에 쥐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수출증대에 모든 역량을 모으고 있던 때라, 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에게는 수출액과 동일한 금액의 수입쿼터를 배정해 주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펴고 있었다.

한국의 기업들이 100만 달러의 의류를 만들어서 이익 없이 원가로 미국에 수출하게 되면, 100만 달러의 수입물량이 주어지게 되므로 의류는 원가로 팔고, 수입한 제품에 마진을 붙여서 상당한 이익을 얻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부산물로 한국에서 미국시장에 흘러온 값싼 의류가 뉴욕 보세창고를 가득 가득 채우고 있었고, 뉴욕 대사관관 영사관에서는 이 의류들에 대한 처분을 할 줄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미시시피에서 옷 가게를 운영 한다는 임계순씨의 제안에, 창고 속에서 썩고 있던 모든 물건은 파격적인 가격과 결재조건으로 최종 협상됐다.

그 일을 계기로 전 미국 37개 도시에 자신의 옷 가게를 직접 운영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임계순 회장의 인생관이자 생활관이다.

급성장 하는 의류 판매사업은 주로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인데, 미국내에서 흑인들의 수는 약 26%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 이어졌고, 대다수인 백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사업을 해 보자는 의욕이 다시 쏫구쳤다.

그때가 1979년초로 한국으로 말하면 철판구이점 형태의 일본식당업에 뛰어 들었다. 호평 속에서 이 가게는 미국 전역에 13개가 운영중에 있다.

그 외에도 리틀락시에는 2천여평 규모의 쇼핑센터를 짓고 운영중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33년 전 한국을 떠 날 때 다짐했던,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은 2001년에 설립한 ‘나노개발회사(Nano Product Develop Inc)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에 선출된 임계순 회장
‘Nano Oil’이라는 제품명으로 개발중인 나노오일첨가제는 그야말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판매를 준비중인 임계순 회장의 마지막 사업이기도 하다.

Nano Product에서는 지난 5년간의 연구개발끝에 금년 중에 10개의 나노관련 상품을 선 보이게 되는데, 나노오일이  그중의 한가지.

최첨단 나노기술이 응용돼서 연료에 첨가하면 15%의 연료가 감소하고, 엔진의 수명도 3-4배 이상 연장되며, 매연도 70%가 감소 된다는 점에서 자동차업계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제품이다는 설명이다.

미국에서 모든 성능과 품질 테스트를 마친 상태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마케팅 전략을 최종 점검하고 있는 중이다.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에 관여 하면서 느낀 점과 향후 계획은 ?

미국에 있는 한국계 교포는 약 250만명으로 이중에서 180만명이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이 분들이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생활 30년에서 느낀 점은 한국인이 갖는 끈기와 창의성은 일본과 중국인이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국민성이라는 것.

“중국인은 끈기만 있고, 일본인은 처음에는 으샤으샤 하지만, 도중에 벽에 부딪치면 간단히 포기하고 말지만, 한국인은 끈기와 창의성으로 난관을 돌파한다”는 것이다.

9월 중순경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는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단 600여명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서 조국에 대한 투자 기회를 제공 할 예정이다.

리틀락에는 어떠한 계기로 정착하고 있는가?
1991년도에 알칸소주 한인회장직을 맡으면서 ATA(미국태권도협회) 이행웅 회장과 함께 하남시와의 자매결연을 위해 노력 했었다.

당시 하남시쪽에서는 임재표 회장이 파트너가 돼서 자매결연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었으며, 지금도 변함 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는 중이다.

리틀락은 작은 소도시 이지만, 한국과는 큰 인연을 맺고 있는 맥아더 장군이 태어나 곳이며, 다국적 세계적인 기업인 유통회사 ‘월마트’가 첫 출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골프계의 장타자인 ‘존 데일리’의 고향이며, 미국 닭의 70%를 공급하고 있는 ‘타이슨’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다.

리틀락은 산수가 좋고 4계절이 있어서 한국과 비슷한 계절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람들이 인심이 좋고 소박해서 많은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1975년 리틀락에 의류판매점을 개설 한 이후, 지금까지 리틀락을 생활근거지로 삼고 살아오고 있다.

이미 자식들에게는 밥 먹고 살만큼의 재산만 남기기로 유언을 남겨 났으며, 그 동안 모은 재산을 모아 1천억원 규모의 공익재단 설립을 추진중에 있는데, 앞으로 3년 후에는 재단이 정식 발족 할 것이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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