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람&사람들
80명 직원과 260명 학생들이 기쁨교육사업에 헌신한 양인석 이사장

1969년 동부실업기술학교 설립해서 야학지원
1985년 성광학교 설립으로 특수교육에 헌신중

경기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심신장애자에 대한 특수교육을 담당해 오고 있는 학교법인 교산학원 양인석 이사장은 어린시절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해 서울문리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던중 1969년도에 동부실업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게 된다.
양인석 이사장의 자전적 스토리를 정리해서 소개한다


   
▲ 교산학원 양인석 이사장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390번지에 위치한 성광학교는 1985년 3월 1일 초등부 1학년 1학급 편성을 시작으로 개교해서 20년이 지난  2004년 현재, 26학급 260여명의 학생들과 80명의 교사가 근무하고 있다.

성광학교를 설립한 양인석 이사장(66)은 동부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홍익대 사대부속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문리 사범대학 사회과를 졸업 했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파란만장한 사연과 극한 상황을 이겨내는 도전의식으로 지금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양 이사장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제시대 하에 서울 마포초등학교를 다녔다. 4학년이 되던 1945년 7월, 살던 집에 소개령이 내려 살 수 없게 되자 부모님께서는 집 보상을 받아 고향인 하남시 교산동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귀향은 하였지만 농토 하나 없는 가난한 삶 이었다. 그러나 학업은 계속해야 하겠기에 동부초등학교 1학년(속성반)으로 들어가 한글기초부터 배우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편안하게 학교 다녔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 일시 학업이 중단 되었으나 9.28 서울수복 되어 학업을 다시 이어졌으나 다시 1.4후퇴로 수업이 또 중단되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중학교 교육시작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지 않아 서울에 들어 갈수가 없고, 군부에서한강을 막아 도강을 할 수 없으므로 아무도 진학은 하지 못했다.

그때 광주군 구천면 구천초등학교(상일초교)내에 광흥고등공민학교가 있어 서울로 진학 못한 모든 학교 학생이 전부 이 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도 진학하지 못하고 있던 중 당시 구천국민학교에 근무 하시고 계시는 은사이신 전창신 선생님을 찾아가 뵙고 입학을 부탁해서 겨우 승낙을 받았다.

중학교육은 시작 됐는데도 난관이 많았다. 두 달분 수업료를 어머님은 갖은 고생 끝에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책, 가방, 모장 등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중 우리 마을에 학교 다니기 싫어 광흥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친구(박용주)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가 빌려 달라고 했더니 쾌히 승낙하고 책과 가방, 모자, 뺏지와 모표 등을 다 내주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취업과 대학입학
졸업후 이모님 댁에서 숙식을 하면서 취직을 구하려던 중 미 8군 노무처(지금의 연건동 서울치대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취직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나도 반가워 그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취업이 안 되어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안될까봐 큰 걱정을 하고 기다리는데 차례가 되어 한국어 통역관이 묻는 데로 대답을 한즉 취업 승락이 떨어졌다.  아!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였다.

합격된 사람들은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날 저녁으로 미군 트럭에 싣고 어둔 밤에 어디론가 실려 가게 되었다. 실려 간 곳은 지금의 철원 허허벌판이었다. 미 7사단 13공병대대 배치되어 군 천막에 야전침대와 군복, 군화 등을 주며 군속으로 일하라는 것이었다.

이때가 1952년 8월초, 학교는 여름방학 중이었다. 포성은 요란하고 포탄은 지척에 떨어지는 듯 두려움 속에 밤이면 초승달부터 보름달 지는 달을 바라보면서 부모님께 알리지도 못하고 떠나온 몸인지라 죄송한 마음 그리운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2-3일 간격으로 편지 쓰는 것이 일과였다.

군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벌어온 돈으로 서울 성북고등학교(지금의 홍익사대부고)에 입학을 하였다.

공부를 한다지만 실상은 자취를 하며 고생길이 시작된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생활비, 학비 모든 것이 어려워 못 다닐 형편 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사범대학에 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당시 사범대학은 남녀공학으로 2년제인 서울문리사범대학 1개교 밖에 없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학생으로 23-4대 1의 높은 비율은 합격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려다가 그래도 가서 시험이라도 보자며 혼자 올라가 시험를 본 결과 합격이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기쁨은 잠깐 입학금 마련 할 일이 정말 어려운 일 이었다.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로 주, 식 생활을 하면서 고난 끝에 1958년 서울문리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광주군에 발령을 받아 분원초등학교, 산곡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초등교사로 근무하면서 주위를 들러보니 고향의 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중학교 진학률 50%미만이었다. 농촌의 어려운 여건에서 중학교 진학이 쉽지 않은 상황을 보고 동부실업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1969년 1학년을 모집하여 개교를 하게 되었다.

개교 후 나는 여전히 산곡초등학교에 근무를 하였고, 가정생활을 위하여 계속 근무를 하려 했으나 1970년이 되면서 초등학교 교장은 동부실업학교 교장이나 초등교사 중 하나를 선택하라며 매일 사임권고를 하여 할 수 없이 동부실업학교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사임 하였다.

그때부터 정말 어려운 빈곤의 삶이 시작 되었다.

   

●교장취임
우리 자식들 3남매도 다른 중학교 진학을 안 시키고 동부실업기술학교에 진학시켰다. 다행히 아버지의 뜻에 잘 따라주어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진학 하였으며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다. 빈곤으로 가정생활은 힘 들었지만 어려운 학생들과의 교육은 참으로 보람 있었다. 졸업 때만 되면 졸업식장은 항상 눈물바다 였다.

80년도 천호동의 유성새마을 학교가 우리 학교로 이사 오면서 우리학교는 밤 낮이 없었다. 낮이면 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학교로 등교하는 주경야독의 학생들로 붐볐다. 그러나 새마을 학교(중, 고등학생) 학생들 가르치기는 정말 더 어려웠다.

●경제부흥 시기
80년대 초에 경제개발계획으로 나라의 살림이 좋아지고 있었다. 따라서 동부실업기술학교와 유성 새마을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없어져 84년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학교는 폐교를 맞게 되었다.

80년도에 정신지체아 학교인 다니엘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황의경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황선생은 동부실업기술학교 자리에 특수학교 설립을 권 하였다. 이 조그만 읍 지역에 장애아이가 얼마나 된다고 특수학교를 설립하여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굳히고 노력한 결과 1984년 12월 28일 성광특수학교를 인가 받게 되었다. 교사는 동부실업학교를 개보수하여 1985년 5월 3일 개교를 갖게 되었다.

●특수학교의 설립동기
1975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석사학위 논문을 '특수아동의 교육조치에 관한 연구'란 제목으로 쓰게 되면서 장애자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마침, 동부실업학교와 유성 새마을 학교가 폐교됨으로서 황의경선생의 권유를 적극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부실업학교의 자리에 성광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특수학교의 운영난
 동부실업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부모님께 1,300여 평의 논.밭을 상속 받게 되었다. 부모님의 삶의 전부였던 작은 땅인 이 논밭을 잘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특수학교를 설립하면서 이마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학교는 초등부에서 중학부로, 고등부로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었는데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내가 살고 있던 덕풍동의 90평 단독주택마저 처분하여 건물을 확장 증축하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몸과 마음 뿐 이었다.

그러나 얻은 것은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200여명의 정신지체 아이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들! 이 아이들이 바로 나의 재산이 되었다.


●성광학교 운영의 어려움
그러나 육영사업, 그것도 외지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성광학교를 어렵게 인가를 받게 되었으나 운영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애자 학교는 일반 학교와 시설이나 운영이 완전히 또 달랐다.

일반학교는 모집하여 교육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그러나 장애자 학교는 모집도 어렵지만 모집해도 통학을 책임져야 하니 차 구입하여 태워오고 태워가야 하는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승용차로 하남시와 광주까지 가서 아침에 태워오고 오후에 태워다 주는 기사 노릇을 해야했다. 더구나 밤에는 숙직도 하며 궂은 일은 도맡아 해야 했다.

교직원은 교장과 선생님 한분에 요육교사, 양호교사 등 4분이고 남자 1명 여자 3명 이었으니 궂은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26학급(유치원2, 초등12, 중학부6, 고등부6 학급)에 26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80여명의 교직원들이 일하고 있으니 크게 발전했다 하겠다. 그러나 아직 시설은 부족한 상태이고 더구나 기존 건물은 수명이 다해가니 앞으로의 일이 또 걱정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희망과 보람이 있다. 항상 나의 주변에는 80여명의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주고 있고,  260명의 손자들을 줄줄이 얻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으리라.
 이제 바라는 바는 우리 학교를 올바른 시각으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고 다 함께 하여야 할 일임을 자각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당부한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저작권자 © 교차로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공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