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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1928년 서울 종로에 있던 단성사에서 당시 18세였던 이 애리수씨가 불렀다고 한다. 노래 소리는 가늘고 애잔하여 관객들을 울렸고, 1932년 음반 “황성의 적”(荒城의 跡)으로 출시되어 당시 5만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인기를 누렸던 이 애리수씨가 향년 99세의 수(壽)로 별세하였다는 소식이다.
이 노래는 그 가사도 가사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마 가장 오래 동안 마음으로 부르던 노래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나도 한때는 이 곡이 18번 중 하나였던 시절이 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면서 회상하는 것은 개성의 만월대가 아니라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은 우리 너른 고을에 있어 어린 시절에 자주 가보던 곳이고, 지금도 가끔 들르는 곳이어서 많은 친근감을 가지고 세세한 곳까지 살피는 곳이기도 하기에 황성옛터를 연상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십수년전 독일에 학생들과 함께 갔던 적이 있는데, 로렐라이 언덕으로 향하던 중 라인 강가의 어느 유원지 식당에 들렀다. 우리 일행이 들어오자 그곳의 악단이 황성옛터를 연주해 주어 결국 무대에 선 적이 있다. 구슬픈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나라의 위상이 독일에 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눈시울이 찐해지기도 했다.
남한산성은 광주에 있지만, 하남, 성남을 걸치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족적을 가진 곳이다. 당시의 역사를 다시 더듬어 보면, 광해군을 왕위에서 폐위한 인조반정에 의해 왕이 된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제창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외교 관계를 유지해온 명나라를 섬기고, 신흥 금나라는 배척하자는 정책이었다. 이후 1636년 청나라 태종은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해온다.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청나라 태종은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 왔다. 인조는 우여 곡절 끝에 남한산성으로 피난 왔지만 겨울에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항전을 거듭했지만, 결국엔 항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삼전도(오늘의 송파)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전도 굴욕』이다. 그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및 여러 대신들이 청나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된 쓰라린 역사이다.
이런 것들을 더듬어 보면, 황성은 허물어진 옛 성터이고, 나라의 흥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소중하고, 더욱이 우리 고장에 이러한 역사의 터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 남한산성이 정말 황성(荒城)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산성은 많은 보수를 기다리고 있고, 특히 벌봉 쪽에는 산성이 나무와 혼재되어 성곽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서문으로 오르는 입구는 너무도 천박하여 산이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도저히 등산길이나 탐방 길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길들이 서문아래에 있다. 서문 쪽에는 서울에서 지하철 5호선에 잇닫는 곳이라 차라리 그곳 입구를 잘 정비하여 산과 수목을 보호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물론 암문이나 수문도 보잘 것 없이 방치 되고 있는데, 황성이라는 말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정비하여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을 거닐거나 성위를 넘나들 때 애국심을 고양할 수 있도록 역사적 유적물을 보전하고 다듬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경기도 도립 공원이므로 경기도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너른 고을의 중요한 유적이므로, 광주와 하남, 그리고 성남이 각각 독자적 관심을 가지고 “다시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후손들에게 자신 있게 가르쳐야할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기가수 고(故) 이 애리수씨의 노래 황성옛터의 노래 말을 회상한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정기성 칼럼니스트 kisungchung@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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