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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와 영화 양산도(陽山道) (1)
  • 조성국 칼럼니스트
  • 승인 2009.02.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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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최근 도내 874곳을 영화촬영발굴지로 선정했는데 하남지역은 미사리 조정경기장 등 10곳이 선정됐다고 한다. 과거, 민요 '양산도(陽山道)'에서 유래한 설화(說話)를, 하남시에서 영화로 만들었기에 이에 관한 것을 살펴본다.

  양산도는 '방아타령'과 함께 대표적인 '경기민요(京畿民謠)'로, 방아타령·자진방아타령·경복궁타령 등과 함께 넓은 의미의 선소리[立唱(입창)]에 든다. 사설(辭說)은 여러 마루[절(節)]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렴의 사설이 6가지로 엇바뀌어 사용되며, 후렴 다음에 나오는 본 사설은 언제나 "에헤이여-"하는 입타령을 높은 음으로 쇠어서 시작한다. 이 입타령은 특별히 세마치[3박자]장단 셋으로 이루어지나, 그 밖에 모든 가락들은 5장단씩 단락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다. 경쾌한 세마치장단으로 장인음(長引音)과 굴곡이 심한 가락을 적절히 대조시켜 흥겹고 씩씩한 느낌의 남도민요(南道民謠)와 대조를 이룬다.  -음악평론가의 평 참조-

  양산도 가사(歌詞)에는 평민 청춘남녀가 사랑을 하는데 여기에 제3의 양반자제가 끼어들어 3각관계의 사랑의 전쟁 끝에 목숨을 잃는다는 애달픈 사연의 설화(說話)가 깃들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에 김기영(金綺泳) 감독이 이 설화를 하남시에서 영화화(映畵化)하였다. 金감독은 영화촬영 전에 하남시를 여러 차례 답사한 후, 촬영장소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 장소는 춘궁동(고골) 일대이다. 

  54년 전인 1955년은 6·25사변을 겪은지 5년, 휴전한지(1953. 7. 27.) 2년 밖에 되지 않았고, 보릿고개가 있던 농경시대(農耕時代)이므로 경제사정이 넉넉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 당시(55년)는 TV방송이 없었고(1956년 5월 12일 TV 최초 방송하다가 중단, 1961년 12월 31일 KBS TV방송국 설립 TV방송 재개), 하남에는 전기도 공급되지 않았다. ‘라디오 수신기(受信機)’도 귀한 시절이므로 하남에서 주민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관계자가 필름을 가지고 현지(하남)에 와서 상영해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때였고, 영화라는 단어 보다는 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향교(鄕校, 교산동 소재) 뒤 민가[영화제작팀에서 임차(賃借)]에 "양산도연출부"라는 간판을 달아 놓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그런데 그 때부터 하남에서 영화[흑백(黑白)-동시 녹음 못 하던 시절]를 촬영하기 시작하였고, 주민들이 촬영하는 과정을 직접 보았으므로 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촬영 완성 후에는 그 해 늦가을 야간에 향교에서 주민들에게 상영해 주었다(유료).

  "인간이란 직접체험이 아니고는 제대로 된 학습효과를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다"라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필자는 되뇌어 본다.

  영화 양산도의 스토리[요약]는 하층민간의 사랑과 이를 위협하는 상류층간의 삼각관계라는 플롯(Plot)으로 다음과 같다.

  수동(조용수 역)과 옥랑(김삼화 역)은 태중약혼(胎中婚約) 사이였다. 그런데 한양(漢陽)에 갔다 돌아 온 김진사(金進士)의 아들 무령[박 암 역, 1983년 타계(他界)]이 옥랑에게 애욕(愛慾)을 품는다. 옥랑의 어머니는 내심 수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차에 이를 이용하여 김진사의 부인과 혼인약속을 한다. 하지만 옥랑의 아버지(김승호 역-현 김희라 부친)는 이를 못마땅해 하며 김진사댁에서 혼인예물로 보내온 비단(緋緞)을 불태워버린다.  어느 날 옥랑을 강제 성추행하려던 무령을 막던 수동은 김진사댁의 하인들에게 끌려가 손가락을 잘리는 사형(私刑, Lynch)을 당한다. 이를 보다 못한 수동의 어머니(고선애 역)와 옥랑의 아버지는 옥랑과 수동을 들판인 밀밭에서 몰래 혼인식을 치르게 하고, 옥랑과 수동은 마을을 떠나 도망친다. 하지만 그들은 첫날 밤을 지낸 후 그들을 뒤쫓아 온 김진사댁의 하인들에게 붙잡히고, 수동은 그 과정에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  김진사댁의 하인들에게 붙잡혀 오는 옥랑을 발견한 옥랑의 아버지는 흥분한 상태에서 하인들 중 한 명의 머리를 잡아 연자방아(법동 소재)의 웃돌(맷돌)에 서너 번 부딪치자 그가 죽는다. 이로 인해 옥랑과 그의 아버지는 구치소(拘置所)에 수감된다. 무령은 옥랑 아버지의 살인죄를 덮어준다는 대가로 옥랑에게 혼인을 요구했고, 옥랑은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결국 허락한다.     <다음호에 계속>

조성국 칼럼니스트  choguk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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