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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글안 등의 외침을 방지하고 민족적인 긍지를 세우기 위하여 대장경을 조조하기로 하였다. 현종 2년(1011)년경부터 시작하여, 76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서 선종 4년(1087)에 완성한 것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다. 초조대장경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하였으나, 고종 19년(1232) 몽고의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몽고병들이 황룡사 구층탑과 초조대장경을 불태운 것은 국민의 지주이며, 신앙의 대상을 없애므로 국민정신을 혼란시키고 방황케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민심은 흉흉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만개기(滿開期)인 경덕왕 때(751)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만들기 시작하여 혜공왕 때 완성한 불국사는 원래 대규모의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목조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으나, 고종 4년(1867)에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위와 같은 문화재의 소실(燒失)에 관한 역사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부르르 떨게 된다. ‘이런 잔인무도(殘忍無道)한 민족들’이라면서 그들의 야만성을 규탄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사건,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崇禮門)이 불에 타서 사라진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서울에 가본 사람보다 안 가본 사람이 남대문의 문턱을 더 잘 아는 체 한다.’던가 ‘남대문이 열렸다.’는 등 남대문은 온 민족의 정문(正門)이었다. 조선조 태조 때인 1398년 완공되어 몇 번의 보수공사를 거치긴 했지만 600여 년의 긴 세월을 우리 민족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같이 나눈 역사의 문이었다.
“국상(國喪)으로 치르자”는 등 숭례문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 움직임도 있지만, 사라진 ‘남대문’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났다.
훗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가록되리라.
‘숭례문은 숱한 병란(兵亂) 및 격변기에도 잘 버티면서, 망국(亡國)의 슬픔과 광복(光復)의 기쁨을 민족과 더불어 나눠 가졌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세계로 뻗어가고 있었다. 암울했던 권위주의정권시대, 시대착오적인 좌파정권시대 모두를 극복해낸 국민들은 희망과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변고(變故)인가. 모자란 듯한 70대 남자에 의하여 ‘남대문’은 한 줌의 재로 변하였다. 당시의 무능하고 부패한 공직자들은 책임전가에 급급하였다. 현재의 숭례문은 21세기의 건축물이다.’
곽근홍 교차로저널 발행인 kocus@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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