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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 권광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07.12.0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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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는 마을을 만든다 

현대 시민 생활을 지켜주는 프레임(틀)은 주민자치-민주주의가 최선의 제도임을 누구도 부정 못한다. 여하튼 성숙한 민주사회에서는 질 높은 삶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성숙한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주위의 주민자치-민주주의를 둘러본다. 주위를 휘젓고 있는 정치는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 희망의 꿈도 언행도 아니다. 미래의 생명과 공동체를 팔아 자기들 배불리는 감언이설이 난무하다.

더구나 감언이설이 유능한 것으로 둔갑되고 있으니, 선하지만 잘나지 못한 시민은 좌절과 무력감에 어찌 할 바 모르고 있다. 순박한 시민들의 꿈과 용기를 엮어주고 있는 “주민자치-민주주의” 언어마저도 그까짓 것이 “밥먹여주나”로 가치 전도된 속설 앞에 긍긍 대고 있다.

이제 선량한 시민들은 유능한 자(?)들이 흩트려 놓은 혼돈의 정치를 다시 투표라는 정치행위를 통해 극복해야 하는 모순된 과제를 풀어야 한다. 시민 자신이 책임지고 극복해 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우리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물음 앞에 서있게 된다. 이 물음은 시민의 존재방식의 근본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시민의 생명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의 성장?개발이데올로기로 주민을 길들여 묶어 가려는 시정의 폭력 앞에 시민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누구나 살기 좋은 지역사회를 바란다. 그리고 주민자치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먹잇감을 엿보며 상냥하게 앉아있는 엉큼한 고양이 목에 누가 어떻게 방울을 달 것인가? 전국이 주민자치 마을, 하남을 주시하고 있다.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에서 “주민자치 민주주의는 소수의 사람이 권위를 얻는 것에서가 아니라 권위가 남용되고 독선이 보일 때 주민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에 의해 실현 되는 것이다.” 고 강조하고 있다. 간디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미 야만의 정치-독선의 행정에서 벗어나는 답을 아는 것이다.

“살기 좋은 지역사회” 만들기는 이웃사람 손 맞잡은 연대 - 주민공동체 운동에서 만이 가능하다. 능력 있다고 자화자찬한 어떤 정치인 어느 정당에게 기대는 건 부질없는 것임을 많이 경험했다. 

민주주의는 투표행위로 주민의 욕구를 담보 해내는 인류가 개발한 최선의 제도이다. 결국 성숙한 주민자치 민주주의의 뿌리요, 꽃이며, 열매는 투표가 만든 작품이고 생물이다. 

투표 포기는 수험생이 시험을 포기하는 것

투표를 포기하는 것은 민주주의 시험장에서 시험을 포기하는 패배주자의 반란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거부한 반민주적 사고에서 나온 오기발동이다. 그러므로 투표포기는 민주주의 위기를 재촉하는 것이다.

투표라는 정치행동에 대해 카터는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려는 도덕적 동기에서 주민자치 마을을 지키는 중요한 힘”이라고 설명한다. 시민의 직접 정치 행동인 투표행위는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시장중심의 질서를 통제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공공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투표행위를 막는 일은 사회의 통합과 소통과 조정과 평화를 압살하는 것으로, 민주주의 근본 생명에 해코지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민주주의 행사에서 투표거부는 그 어떤 감언이설로 포장해도 내용은 진정성이 없다. 사실 주민자치-민주주의는 공동체의 공론 장을 보장하는 사회적 합의제도다. 그리고 그 공론은 곧 투표행위에서 발현된다.

만일 이런 공론 장을 걷어치우고 다른 언어로 치장하는 경우 그곳에는 오만과 독선과 폭력이 숨어든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공론 장을 거부하면서 시민을 위해 일 하겠다는 유능한(?)정치인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순은 극복되어야 한다.

토지가 자꾸 황폐해 지는 까닭은 “농사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은데 쟁기를 드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고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꼬집은 한비자의 말을 새겨본다.

주민소환투표를 맞아 투표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꺼림직 하다고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 투표가 어떤 사람을 죽이는 몰매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투표하는 시민은 증오를 넘어, 소환해당자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선한 생명들과 지역사회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투표행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둘을 놓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결국 하나가 옳은 것으로 되어야 한다.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민주적 의사표시인 투표의 포기는 바로 이웃 사람과의 연대 포기요, 정의로 부터의 도피요, 민권의 자폭이며, 민주주의 유괴이다. 시민의 헌법적 권리의무를 내 팽개치고 나서 세상에 대해, 정책에 대해, 세금에 대해 무슨 불평불만을 제기 할 자격이나 염치가 있겠는가.

서러워라! 무서워라! 시민이 희망이다.

오늘 한국은 경제적 대국(세계11위)이다. 그래 한국사회가 풀어야 될 문제는 성장개발이 아니라 양극화와 부패의 고리이다. 이 문제는 성숙한 주민자치 민주주의 아니고는 풀 수 없는 매듭이다. 부패와 오만과 독선을 막는 유일한 민주방식이며 정치?행정결과에 대한 주민심판이 투표행위다.

그러니까 투표의 포기는 민주국가의 합법적 개혁공간을 폐쇄하는 것이고, 헌법적 주권행사를 훼방하는 헌법 파기행위다. 그것은 용서 안 되는 범법행위요, 반민주적 함정에로의 엉큼한 유혹이다.

투표행위가 포기되는 경우는 자기의사와 관계없이 불순한 의사표시로 바꿔 계산된다. 세상에 자기는 분명 거동하지 않았거나 동쪽으로 갔는데 서쪽에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기막히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런 기막힌 도깨비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 소환투표 포기다. 투표거부 속살에는 모순의 함정이라는 꼼수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적 신념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모두 똑같은 것들이여” “투표하면 뭘 해” 라는 말속에 담겨있다. 정치 행정 지도자로 유능하다고 자찬하는 저들이 무책임하게 쏟아낸 말장난 성찬에 진저리가 나서 하는 말이다.

어떻든 투표 포기는 민주주의 행사에서 정도가 아닌 반칙이다. “홧김에 서방질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답답하고 분해서 그렇겠지만, 그러면 망가진 것은 누구이고 덕 본 것은 누구이겠는가. 투표 거부는 미래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사회변혁의 비전에 가능성을 기대 할 수 있겠는가. 국민의 유일한 참정권을 포기하고서 무슨 좋은 정치, 좋은 지역사회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민주주의 대명천지에 눈 지그시 감고 “투표하지 맙시다.”고 말하는 반민주 폭언 앞에 주민자치 민주주의를 그리는 순박한 시민은 「서러워라, 무서워라」염불처럼 이 말만 한다. 그래도 시민만이 희망이다.

 

권광식 칼럼니스트  kocus@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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