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공룡도시 서울의 생명녹지대로 부역하고 있는 위성도시, 인구 13만의 작은 하남시가 사상 처음, 전국 최초로 주민소환 시험에 몸살을 하고 있다.
김황식 시장은 지자체 선거가 끝나고, 어느 날 물질적 성장개발만이 지역발전이라고 운을 띄우더니, 30여 만 평의 생명녹지를 파헤쳐, 시멘트 부어 발라, 세계최대의 광역 장사시설 유치 강행군을 지휘하고 있다.
시민의 공감대 형성과정 없는 행정의 독선적 결정이 평온했던 지역을 반목과 갈등과 고소고발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게 한 것이다.
막상 시민, 삶터 현장은 성난 목소리에 흥건히 젖어 있는데, 시정의 홍보물엔 “새롭게 도약하는 살고 싶은 지역”으로 천연스럽게 포장되고 있다.
주민과 행정이 따로 겉돌게 될 때 시정(市政)은 독선과 오만의 행정권력으로 쉬엄쉬엄 타락하게 된다.
독선과 오만의 행정권력이 시민과 만날 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권력이 시민을 윽박지르다가 약점을 찾아 슬금슬금 보복행정이 배회한다.
이럴 때 요것들에 대한 각성의 유일한 통로는 시민권 확보(헌법적 보장)의 깨어있는 시민의식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개발사업의 업적과시가 능력으로 상징되는 거만한 관료주의는 주민연대를 통해 가능해지는 시민공동체-시민권 확보 (더디지만 폭넓게 고루 확산되는 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배려와 인식을 기피한다.
게다가 오만한 행정권력은 주민소환제 같은 참여민주주의를 (헌법적 시민권과는 상관없이) 단체장의 권한과 소신행정을 훼방하는 사치정치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주민소환법은 주민참여 확대와 지역행정의 민주성, 책임성을 최우선으로 강조 (제1조) 하고 있다.
오만한 행정권력은 권한만을 주장할 뿐 “권한 있는 곳에 책임 있다”는 규칙 앞에서는 딴전을 피운다. 겨우 한다는 말은 “경제적 발전이고 효율성” 뿐, 시민적 삶의 질에 대한 자신들의 후진적 인식에는 부끄러움은커녕 아무런 책임감도 없다.
주민소환의 시대적 의미는 오만한 행정권력이 더 이상 준동할 기세를 묶자는 것이고, 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천박한 이해수준을 적어도 시민의 눈높이로 끌어 올리자는 것이다.
김황식 시장의 주장은 대단위 장사시설에서 새어 나온 죽음의 다이옥신과 미진 등을 전기집진, 습식세정, 환원촉매장치 등으로 99% 이상 제거할 수 있다”는 실험실 보고서 (국립환경연구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돌발사고 위험이란 인간과 기계의 숙명적 한계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기계가 자연을 언제나 이겨본 일이 없다.
다이옥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분진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핵심은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운영의 천박성, 지금 괜찮으면 다음은 책임 안질 수 있다는 임시성과 부정직, 그리고 한정된 자연에 대한 대규모적 과부하성이 당장은 안 보이는 장사시설 운영의 문제점이다.
합성화학비료, DDT,DES 등은 개발 당시 빛나는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몇 십 년 뒤 지금은 우리 옆에 무서운 재앙으로 변해있다.
안전성 실험에도 문제점이 있다. 독성이나 발암성 테스트를 그저 동물실험결과로 판단한다. 예를 들어 쥐에게 다이옥신 100g을 먹이자 죽었다. 그런 경우 사람에게는 그 양의 100분의 1, 즉 1g까지는 사용해도 좋다고 결정하는 식이다. 이런 방식이 후환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도시확장개발사업이 언제나 어디서나 반드시 예찬의 대상은 아니다. 그나마 개발과 발전을 희망하는 것은 그 곳에 인간적 품격과 생명 수호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발사업이 오만한 행정권력의 틀 속에서 놀아난다면 주민들의 희망은 구속되고 안전망은 허술해 진다.
가난한 동네가 지옥이 아니라 구원의 희망이 없는 곳, 거기가 지옥이다. 그곳은 오만이 지배하는 화려한 포장 그림동네가 된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대단위 화장터 사업강행은 결국 시민권 개념을 결여하고, 시민 없는 시민공동체-시민 없는 도시건설의 위험이 있다.
오만한 행정권력에 저항하는 몸부림마저 이렇게 힘겨워야 한다면 주민자치•참여민주주의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권광식 칼럼니스트 kocus@kocus.com
<저작권자 © 교차로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하남] "3호선 첫 삽도 안 떴는데...감일에 또 6,50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