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무(講武)는 임금이 친히 군사훈련을 참관하거나 참여하는 제도로서 주로 수렵을 통하여 진행되었던 군사조련의 한 방법이었다.
하남지역은 백제시대 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신라가 충돌하면서 세력을 겨루는 각축장이 되어 왔기에 옛부터 이미 군사적요충지로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하남시를 둘러싼 주변에는 이성산성을 비롯하여 남한산성과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설치되었던 것이며, 역사상 국가 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군사를 조련하고 더욱 강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수렵과 강무의 기록은 오래전부터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개루왕이 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다는 기록이나, 구수왕(仇首王) 때 한수 서쪽에서 군사를 대열(大閱)하였다는 기록 등 삼국사기에는 수많은 열병(閱兵) 기록이 보인다.
이어서 고이왕(古爾王) 7년 4월에는 군사를 대열할 때 한 쌍의 기러기가 날아오르자 임금이 쏘아 모두 맞혔다고 하여 국왕이 친히 참가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한 행사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는데 국왕의 친림(親臨) 아래 거행되었다.
1396년(태조 5) 삼군부(三軍府)의 건의로 의식규례가 마련되었고, 이어 《국조오례의》의 군례(軍禮)에 그 의례절차가 정비되었다.
서울에서는 사계절 끝 무렵에 시행하고, 지방에서는 봄 · 가을에 하며, 이때 잡은 동물로 종묘 · 사직과 지방 사직에 제사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왕을 비롯해서 대군 · 왕자 · 무관 등이 참석하고, 병조에서 사냥터를 정비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사냥이 시작되면 장수들이 북을 치고 행진하며, 몰이하는 기병이 출동한다. 세 번째 몰이 때부터 왕이 세 짐승을 먼저 쏘고, 이어 왕자들과 장수 · 군사들이 차례로 쏜다.
몰이하는 기병들이 철수하면 백성들의 사냥이 허락되며, 잡은 짐승은 병조에서 꼽은 기 밑에 모아 왼쪽 귀를 벤다. 여기에 모인 큰 짐승은 관에서 처분하여 좋은 고기는 종묘에 보내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는 그 자리에서 요리하여 잔치를 베풀며, 작은 고기는 개인이 가지고 간다. 한편 강무를 하는 강무장은, 조선 초기에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1420년(세종 2) 경기의 광주(廣州) ·양근(楊根) 등지, 철원 ·안협(安峽) 등지, 강원의 평강(平康) ·이천(伊川) 등지, 횡성(橫城) ·진보(珍寶) 등지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조선 건국 후 강무를 시행하게 된 배경은 태조 5년 11월에 의흥삼군부에서 올린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주(周)나라에서는 봄과 여름에 군막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가을과 여름에는 군사를 사열하는 제도가 있어서 평소에 군사를 잘 훈련함으로써 유사시 활용하였는데, 진(秦)나라에서는 이런 제도가 없어서 함곡관(函谷關) 에서 쉽게 패배한 것이라고 하면서 주나라의 제도를 가감하여 사냥하여 강무하는 그림(蒐獸講武圖)를 그려 서울에서는 사계절의 끝 달에, 지방에서는 봄가을에 강무하여 짐승을 잡아서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임금이 인시(寅時)에 과천을 출발하여 광주(廣州) 사근천(沙斤川)의 주정소(晝停所)에서 머물렀다. 상이 막사에 나아가 병조 판서 홍중보와 어영 대장 유혁연을 인견하고는 혁연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어영군이 뒤에 있게 하라. 내가 수원 군대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어제는 조금 떨어진 모래 사장에서 진을 쳐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만일 좌우에 진을 치도록 하여 그 사이를 통과하면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하니, 혁연이 아뢰기를,“총융사에게 분부하여, 앞의 들판에 진을 치고 좌우로 나뉘어 기다리다가 어가가 군문에 도착하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꿇어 엎드린 후에 그대로 앞서 가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윤제양 기자 yjy@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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