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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주향교김종규 문화해설사

향교는 고려성종(981-987)때 경학박사를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향교가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이념과 한문교육으로서 관리로 임용될 수 있는 준비기관으로 지방 문화의 거점으로 사회제도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했으며 조선시대는 인재등용문의 역할을 했다.

현 위치의 광주향교는 1703년(숙종29년)부윤 이제(李濟)에 의해 이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구 향교자리는 在州西二里(재주서이리)라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광주조) 즉 고골저수지에서 향교 고개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별장터로 부르는 곳에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고 그 주위에는 주초석과 와편이 고려시대의 건축물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이 고장에서는 거의 볼 수없는 화강석이 파손된 부재가 있으며 문헌과 설화가 일치되는 점을 구 향교자리라고 볼 수 있다.

광주 향교의 외삼문은 소슬대문으로 東入西出(동입서출), 즉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오는 문 출입의 예의가 있다.

중앙의 큰문은 신이나 왕이 드나드는 것으로 일반인은 출입을 금한다. 명륜당은 면적이 25평으로서 사학의 전당으로 모든 교육이 이곳에서 가르쳐진 곳이다.

明倫(명륜)이란 맹자의 동문공편에 나오는 구절로 향교를 세워 교육하는 것은 인륜을 밝히기 위함이다. 석존제는 제단위에 제수를 놓고 절과 술을 드리는 의식을 뜻한다. 명륜당 서쪽에는 교직사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고 뜰 옆에는 동제와 서제가 있었는데 동제는 53년 전에 철거되고 2003년에 다시 건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동제는 양반의 자녀들이 숙식하고 서제는 서출과 양반의 아들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명륜당은 다포게 형식의 집이고 서제는 민도리집이다.

내삼문안에는 대성전과 그 앞 옆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대성전은 주심포 형식의 집으로 대성전을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은 성현의 배향을 우선으로 하고 진실된 예우의 형식이다.

대성전은 28평으로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성현 공자를 비롯한 5聖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오위를 모신 곳이다.

공자는 서기전 551년 출생해서 서기전 479년 돌아가신 유학을 창시하신 성현이고 안자, 증자는 공자의 제자, 자산은 공자의 손자며 증자의 제자, 맹자는 자사의 제자로 공자의 100년 후의 인물이며 인의예지 4서를 적립시킨 분이다.

서무 9평에는 송조(宋朝) 주자 신라 최치원, 고려 정몽주, 조선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시체, 동무9평에는 송조(宋朝) 정자 신라 설총, 고려 안향, 조선 김광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위폐를 모셔놓고 봄에 지내는 석전제에는 광주시장이 초헌관, 전교가 아헌관, 종헌관은 교육장이 각각 맡는다. 가을에는 하남시장이 초헌관, 아, 종헌관은 동일하다.

석전제 행사는 향교가 성균관의 지시에 따라서 5성 18현의 유교사상의 업적이 있는 분을 모셔놓고 충효사상을 고취 시키며 시대의 변천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향교는 서원과 달리 국비로 운영되며 도덕을 중시해 문예들의 연구기관으로 유도회가 주관해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효도사상과 한문 서예를 가르치면서 심신을 가다듬고 지역의 발전과 옛것을 중시하며 성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유도회가 향교 본연의 뜻을 전하고 있다.

광주는 고려때는 목으로 제일 큰 행정구역이었고 조선시대는 정2품 유수가 한때 관할하는 지역으로 현 광주, 하남, 성남,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등 많은 곳이 광주군에 속했다.

광주군의 유일한 향교로서 교육의 도장이었다. 관청지가 향교 서쪽 150m지점에 있었다고 하며 행정의 중심지와 교육의 맥을 이어오는 지역으로 백제 때의 고도로 역사의 진실이 묻혀진 곳으로 고려 때는 목으로 번성했던 고장이 공허한 마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국적을 초월하며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추모하고 충효의 사상과 인의예지는 사회의 질서유지에 있어서 가장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생활의 기본일 것이다.

향교는 조선시대를 이끌어 온 민중적, 사회적 교육의 맥을 같이해왔고 양반과 상놈의 차별로 인해서 대중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윤리 도덕을 기본으로 민간심리의 믿음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理論(이론)의 교리로서는 내세가 없어 미완성 되어 종교로서 정착되지 못하고 논리의 정확성이 부족하여 사후의 미래가 제시되지 못했다.

600년 세월의 사회를 이끌어 온 유학적 향교는 교육적 차원의 길만 제시하여 사회제도에 정착하지 못하였다.

지금과 같은 종교의 다양화로 국민적 정서나 정신적으로 이념의 빈곤을 초래 하였다.

유교의 근본사상은 仁義禮智(인의예지)로서

仁의 개념은 참다운 사람, 사람과 사람을 뜻함이고 인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정신이다.

義는 윤리의 개념인 동시에 사회정의 개념, 인간생활에서 옳은 것을 지키고 이를 실천하는 행위,

禮는 사랑을 실천하고 윤리 도덕의 기본이다.

智는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슬기로움이다. 조상의 뜻과 얼을 보존하는 것은 민족 생존과 사회질서를 이어가기 위한 정신적 지주이다.

명륜당 안에 스승의 공간은 약 10cm정도 높게 만들어졌다. 대성전보다 명륜당이 높게 지어진 것은 햇빛의 각도를 맞추어 에너지원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고 북쪽에는 소나무를 심어 변함없는 절개와 충성을 의미하며 북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은행나무인 활엽수를 심어 여름엔 그늘을 지어 시원한 장소를 제공하고 동쪽에도 그 옛날에는 활엽수가 있었을 것이다.

겨울에는 낙엽이 지어 햇빛이 잘 통과하게 했을 것이며 자연을 잘 이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향교의 건축은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학적 근본은 없고 형식만 남아있어 분위기 또한 사라져가고 있으며 향교의 의미를 상실한 현실에서 과거의 현상을 볼 수만은 없는 것, 아직도 우리의 생활습관에는 유학적인 맥이 이어져오고 현재를 과거로부터 격리시킬 수 없는 것, 세계화 시대를 맞아 한 문화권에 있는 나라와 문화 언어의 소통이 필요한때, 역사와 전통의 맥이 있는 향교의 공간 활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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