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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설화 시리즈>도미설화 마무리도수희 교수의 도미설화

요컨대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제21대 개루왕 말기(서기475)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미전의 전설화 또는 전기(傳記)는 고구려 문자왕 말년(서기518) 이후일 것으로 추정한다.

도미의 신분은 소민이 아니라 정승 반열의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미의 거주지는 당시의 수도(현 하남시)에 가까운 현 경기지역 안(內)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미가 체형으로 두 눈동자를 잃고 배에 실려 띄워진 강안(혹은 河上)은 현 경기도 하남시 동부면 창우리(창모루)의 검달뫼(黔丹山) 기슭의 한강가에 위치한 도미진(渡迷津ㆍ豆尾津ㆍ斗迷津)이었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문제의 천성도(泉城島)는 현 교하면의 서쪽 20리에 있는 얼물섬(一尾島)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람들은 소설속의 주인공이 삿도의 수청만 거절하여도 장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춘향의 절개는 만인의 흉금을 울린다.

그렇다면 하늘처럼 지존한 왕명을 거역하면서 일부종사(一夫從事)한 여인의 정절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허구가 아닌 실화이기 때문에 더욱 고귀한 것이다.

이렇듯 출중한 열녀의 실화가 있었으면서도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자랑으로 여기는데 너무 인색하였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처음 기록한 문헌을 찾아낼 수 없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서기 1145년)에 이른바 『구삼국사기』의 내용을 옮겼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세종대왕은 가장 훌륭한 효자ㆍ충신ㆍ열녀를 선정하여 그 행적을 글로 싣고 각각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여 아울러 싣게 하였다. 그래서 책이름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 부른다.

이 책의 열녀 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빼어난 여섯 열녀를 소개하였는데 그 중에서 백제의 ‘도미부인’이 최초의 열녀로 올라 있다. 그 뒤에 고려 열녀 2인, 조선 열녀 3인만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이 여섯 열녀 중에 도미부인이 한국열녀의 효시(嚆矢)일 뿐만 아니라 내용도 으뜸이다.

세종대왕이 삼국 시대의 열녀로 유일하게 가려 뽑아 최초의 열녀로 맨 앞에 내 세운 데는 그럴만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한국 열녀의 표상으로 삼아 백성을 교화하여 불윤의 범행을 사전에 예방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의 어지러운 세태는 세종대왕의 범죄 예방 정책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고로 나라에 충성한 충신의 사당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에 성역화한 이 충무공의 사당이다.

물론 역대 열녀에 대한 정려도 방방곡곡에 많이 세워져 전한다. 하다 못 해 소설의 주인공 춘향의 고장에도 기념사업이 이루어져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백제 열녀 도미부인은 거의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평범한 열녀가 아닌데다 한국 열녀의 조상인 도미부인을 이제 우리의 대표적인 열녀상(烈女像)으로 부각시켜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

러자면 『삼국사기』의 도미전을 중심으로 이 사건이 발생한 본래의 성지(聖地)(한홀>광주, 현 하남시)에 사당을 크게 지어 성역화하고 한강변의 ‘도미나루’를 비롯한 유적을 추적하여 정자를 세우거나 ‘열녀송덕비’를 세운다면 두고두고 성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역화의 사업은 어느 개인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기필코 나라의 지원을 받아 하남시가 주관하고, 문화관광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야 할 막중한 사업이다.

이는 참으로 뜻 깊은 국책사업이 될 것이다.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이 시대적 요청이 공인(公認)되기 바란다.

그리하여 하루 속히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어 우리는 물론 후손들까지도 우러러 참배할 정절의 사당이 건립되고 아울러 ‘도미나루터’가 옛 모습으로 복원되기를 간곡히 희구(希求)한다.

윤제양 기자  yjy@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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