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도미가 백제의 개루왕 때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의 왕력에 제4대와 제21대 왕의 이름이 똑같은데 있다. 제4대 개루왕은 서기 128년부터 165년까지 38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제21대 개루왕은 서기 455년부터 475년까지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삼국 시대의 왕명을 보면 같은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백제 제4대 개루왕~제21대 근개루왕, 제5대 초고왕~제13대 근초고왕, 제6대 구수왕~제14대 근구수왕 등과 같이 선대의 왕명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던 관습이 있었다.
물론 선대왕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과 같이 호칭 앞에 근(近)자를 붙여 사용키도 하였다. 이 ‘근’은 大를 의미하는 ‘근(>큰)’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어느 개루왕 때에 도미의 사건이 발생한 것인가? 제4대의 개루왕 때는 아직 건국 초기라서 그런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사회적인 상황이 성숙되지 않았다.
아직은 부족국가에 가까운 작은 나라이었을 당시의 백제와 또한 초기 부족국가로 졸본에 건국한 고구려 사이에는 대방.옥저.예맥이 건재하여 있었기 때문에 도미전의 내용 중 “고구려의 산산 아래에 피신하여 여생을 마쳤다.”는 사실이 제4대 때에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제4대 개루왕은 “품성이 공손하고 조행이 있었다.(性恭順有操行)”는 기록이 있어 가능성을 흐리게 한다.
물론 이 내용은 참고 사항에 불과하지만 위 기록을 믿는다면 제4대 개루왕은 그렇듯 호탕하게 ‘도미전’의 사건을 자행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면 제21대의 개루왕 때를 면밀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때의 백제는 영토가 황해도.경기도.강원도(嶺西).충청도.전라도에까지 확대된 최강의 시대이었다.
따라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도미전의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을 만큼 시대적 배경이 여러 모로 성숙해 있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도미전의 배경이 된 지명인 ‘도미진ㆍ천성도ㆍ산산’은 제21대 개루왕 이후에 발생한 것이며 그 이전에는 오로지 앞에 언급한 한자 지명에 대한 고유지명인 ‘얼매곶, 매시달’만이 쓰였기 때문에 ‘도미전’의 발생 시기를 제4대 개루왕 때까지 소급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제21대 개루왕은 성품이 매우 호탕하고 호전적이었다. 개루왕 15년(서기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변을 침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년에는 급격히 국세가 기울어 동왕 21년에 장수왕의 남침으로 서울 한홀(漢城>廣州)은 함락되고 개루왕은 비참하게 전사한다.
겨우 망국만을 모면한 점만이 다를 뿐 나머지 부분은 의자왕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절대적인 패인은 고구려에서 밀파한 간첩 도림(道琳)과 바둑을 즐긴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바둑의 대목은 ‘도미전’에서 왕과 도미가 내기장기를 둔 점과 정확히 부합된다. 따라서 도미전의 사건은 제21대 개루왕의 재위 21년(455~475) 동안 중 후반기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후반기 중에서도 거의 말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다음에서 고증할 천성도(泉城島)․산산(蒜山) 그리고 고구려에 망명하였다는 대목과 맞아떨어질 수 있게 된다.
윤제양 기자 yjy@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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