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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온 집안도 있지만, 반면 일제 강점기 독립을 부르짖으며 항거하기 보다는 현실에 적응하여 그런대로 잘 살아 그런대로 부유한 가족들도 적지 않다.
수년전 보도되었던, 진달래 시인 김소월의 장성한 자녀들의 이야기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좋지 않은 사회적 환경을 원망하면서 적응하지 못하여 일찍 타계한 김소월의 자녀들은 교육받지 못해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그 부모들이 현실에 적응하여 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교육을 받은 세대로 해방 후 고위관직에 오르거나 상층부를 형성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등 항일세력들과 친일 세력들의 생활상은 그 차이가 많은 것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도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모 보통학교를 나와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그리고 귀국하여 토지관련 공무원을 하다가 해방 후 교사가 된다. 그는 순탄한 교직생활에서 중등 고등 교장 등을 역임하고 교대 학장도 하는 등 교육계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내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존경을 받는다.
부인은 일제 강점기에 보통학교를 나오고 모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국민학교 교원을 지내는 등 교사로서 일생을 다한다. 자녀는 3남3녀 이고 3남은 모두 의학을 공부시켜 의사로 박사로, 딸은 모 체육 분야 대표선수를 지내는 등 소위 자식도 아주 잘 키운 훌륭한 집안이다.
이 내용은 3.1절 휴일을 이용하여 수련회 참석차 가 있던 어느 지방에서 숙소 근처를 아침 산책하다가 우연히 들여다보게 된 묘비의 내용이다. 이 쌍 묘의 양쪽 비석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으면서 일제 강점기 치하 이지만, 좋은 교육 받고, 좋은 대우 받고 좋은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3.1절 새벽이었기에 만세운동이 이 묘비들과 어떤 의미가 연결 되는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 가정의 삶은 당시 시대의 모양이기도 했다. 좋은 일본 학벌에 좋은 지위는 해방 후에도 순탄한 출세를 보장했다. 그러나 농사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제 수탈에 시달여야 했고, 자녀 교육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가난을 대물림하기 쉬운 상태였다. 다만, 5.16혁명이후 민생을 최우선했던 정치와 그리고 산업 발전을 기초로 경제 부흥에 의지해 전체 생활상이 나아진 상황이다.
이러한 가정도 있다. 동생에게 징용이 나온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동생 대신에 징용 가게 한다. 이 큰 아들은 규슈의 한 탄광에서 광부의 일을 한다. 탄광에서 도망하여 대도시로 가려다가 붙잡혀 두들겨 맞아 허리가 온전치 못한 채 해방 후 귀국한다.
양반집 규수가 교육자 신랑과 혼인해 자녀를 낳는다. 그러나 남편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교장 자리를 버리고 만주 등을 헤매다 일제에 잡혀 함흥 감옥에서 순사한다. 그 딸은 징용을 다녀오느라 혼기를 놓친 노총각과 결혼한다.
이것은 다른 묘비에 있는 내용이다. 이 두 가정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세를 생각하게 한다. 현세에 적응 하는 것과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지는 것, 역사는 창조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흐르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각 가정의 삶이 각양각색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비에 나타난 이 두 가정의 사례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의 방향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는 3.1절이다.
정기성 칼럼니스트 kisungchung@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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