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이전-오피니언칼럼
[아침을 열며]힘 있다고 다 이긴 건 아니다
  • 권광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06.11.24 09:11
  • 댓글 0
   
 
 

 

 

지금 생활에 지친 주민들은 함께 희망을 엮어가는 우리들의 시정(市政)을 그리워  한다. 누구한테 받아먹는 시혜가 아닌, 함께 오순도순 꾸려 만드는 사랑 같은 희망이야기 말이다. 한참 시끄럽게 논쟁되고 있는 화장장 문제를 비롯 여러 쟁점들은 사실 주민 위한 하나의 사랑싸움일 테지만, 그것이 어디를 치고 돌아나가는 회오리바람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한쪽은 지역발전이요, 다른 쪽은 삶의 질을 강조하는 작은 차이 같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더 큰 갈등과 성찰을 치러야 되는 사안으로 되고 있다.



  어쨌든 누군 살고 누군 죽는 쌈판만은 거부하면서도, 웬지 헝클어진 실타래 안으로 서로가 감겨들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지역발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우리들의 희망이야기를 꾸려가야 한다는 과제를 함께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저기 펄럭이는 깃발은 분명 “주민을 생각한 시정-지역발전 위한 사업”이건만, 이해당사자 주민의 공감대와는 겉돌고 있다. 왜 그럴까? 서로간의 소통(疏通)이 막힌 까닭 아닌가. 시정책임자는 그 누구보다도 주민을 가장 사랑하고, 지역에 쏟은 애정 또한 누구 못지않을 것인데도 사랑의 상대와 삿대질 시비가 일고, 각을 세운 갈등이 퍼져가는 판이다.



  이 언짢은 시간대에 머리 식혀 <장자>의 이야기 한번 들어볼까요?

  <장자>는 일의 성사에 있어서 우선 상대 타자(他)와의 소통이 아주아주 중요하며,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自己)의 변화(省察)를 당연한 순서로 강조하는 동양의 옛 현인이다. 그는 세상사 모든 것에서 “힘 있어 힘쓴다고 다 이긴 건 아니라”고 급하게 서둘러 대는 현대인들에게 정중히 충고해 주는 스승으로 보면 된다.



  옛날 노나라 지역에 바다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는데, 임금은 바다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서 소, 돼지, 양을 잡아 진수성찬을 대접한다. 그러나 바다새는 슬퍼할 뿐 고기한 점 받아먹지 않은 채 사흘만에 죽고 만다. 임금님의 지극한 사랑이건만 바다새에게는 협박 같은 고문에 지나지 않았던 것. 그 사랑은 임금님 방식의 사랑일 뿐, 바다새의 사랑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장자>의 이야기에선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노나라 임금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바다새를 무척 사량했다는 점. 그러나 임금님의 지극한 사랑이 결과는 도리어 참혹했다는 점. 임금은 자기가 좋은 것처럼 새에게도 좋을거라 자기맘대로 생각하고 우격다짐으로 한 것들이 끝내는 새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임금님은 바다새에의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아직도 왜 바다새가 자신의 곁을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허망과 배신에 성난 가슴만을 움켜쥔 것이다. 이때 <장자>는 노나라 임금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준다. 비극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고,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노나라 임금은 먼저 새와 소통하지 않고, 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은 생각 않고, 자기업적-자기만족을 위한 자기식 사랑에 취해 버린 것이다.



  효율성, 경제성의 깃발만 더 높이 휘날리는 세상, 개발과 성장만이 살길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에게 <장자>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 일찍이 그는 “메뚜기에게는 얼음 이야기 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라고 충고도 같이 했던 것 아닌가.



  우리 사회의 그동안 많은 갈등의 체험은 이제 어떤 세력도 자신의 의도를 다른 세력에게 강제할 수 있는 힘(권위)을 허락하지 않는 주민의 체력단련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세력이 다른 세력의 주장을 좌절시킬 수 있는 거부권을 획득한 사회는 그 어떤 변화 발전도 불가능한 판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국면을 해소하는 길은 싸움판이 아닌 소통의 관계법을 익히는 일이다.



  어쨌든 똑똑한 사람, 권세 있는 지위에 있을수록 타자(市民․百姓)에의 사랑이 아주 일방적일 뿐, 그 타자와의 소통에 소홀하다. 실로 역사의 교훈은 타자와 소통하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먼저 자신의 변화(자기성찰) 없이는 타자와의 소통도 불가능함을 알려주고 있다.



  <장자>의 충고나 <역사교훈>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자기성찰에 등한 시 말고,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도 직시하고, 그리고 백성들의 아우성에도 귀 기울이라는 것 아닌가. 지역사회의 발전, 한시대의 변화는 그런 다툼과 소통과 깨달음의 경로를 거치면서 다져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권광식 칼럼니스트  kocus@kocus.com

<저작권자 © 교차로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광식 칼럼니스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