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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볼 때 국내적으로 정권과 관련해서 지조(志操)를 지킨 분들은 사육신(死六臣)이고, 외국의 침략에 맞서 항복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분들은 삼학사(三學士, 홍익한·윤집·오달제)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나라 태종[皇太極(황태극), 홍타이지]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해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인조임금은 강화도로 피란하려다가 적군이 앞길을 막아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여기서 45일 동안 항전했는데 신하들은 항복을 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결사항전해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로 나뉘었다. 이후 삼전도(三田渡, 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인조임금이 수항단(受降壇) 상에 앉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크게 엎드려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부딪침)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했다. 우리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이다.
청태종은 소현세자, 봉림대군 두 왕자와 그 가족 그리고 척화파인 홍익한·윤집·오달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인질 또는 포로로 청나라 수도인 심양(瀋陽, 봉천)으로 잡아 갔다. 청태종은 이들 삼학사의 항복을 받고자 회유를 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자 청태종은 판자에 긴 못을 쭈-욱 박은 여러 개의 판자를 자기 앞에다 엎어 놓아 못으로 된 가시밭길을 수 m나 만들어 놓고 이 세 사람이 맨발로 걸어서 자기 앞으로 오도록 하는 고문을 했다.
홍익한이 앞에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두 명 중 한명이 상을 찡그리자 홍익한이 왜 상을 찡그리느냐고 고함을 치자 씩씩하게 걸어서 청대종 앞으로 갔다. 청태종이 이제 항복하라고 하자 못한다고 하자 청태종은 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조선의 왕은 이렇게 지조가 있는 훌륭한 신하를 두었으니 참으로 부럽도다!”라고 하면서 탄복,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3명을 비록 처형했으나 그 기개와 충절을 기려 청태종은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과 추모비를 세워 추모하도록 하였으며, 추모비에는 “三韓山斗(삼한산두-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삼인)”라는 비문을 내렸다. 이 비는 현재 중국 요녕성 심양시 발해대학(渤海大學) 교정 내에 두 동강 난 채 보관되어 있는데 높이 2m 폭 80㎝다.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 내에 있는 현절사(顯節祠)는 이 삼학사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는 사당(祠堂)이다.
병자호란 3년 후인 인조 17년(1639) 12월에는 청태종의 조선 정복을 기념하도록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를 항복 장소인 삼전도에 세웠다.
현재는 원래 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역사공원에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라는 안내문과 함께 서 있다. 이러한 역사유물을 치욕스럽다고 방치 할 것인가? 아니면 더욱 잊지 않도록 선명하게 보존해 후세들에게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겠지만 통한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부국강병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삼전도의 굴욕’은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후세들에게 일깨워야 한다. 치욕의 역사를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주었던 청나라는 3백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이제 명맥을 찾기 어렵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삼전도비 옆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관심하다면 서글픈 일이다.
삼학사의 꿋꿋한 절개는 우리민족의 기개(氣槪)요, 후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귀감이므로 학생들에게 현절사와 삼전도비를 산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조성국 칼럼리스트 cho-g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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