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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고골(춘궁동, 항동, 상사창동, 하사창동, 교산동 등 5개동 내에 자연마을은 12개 마을)은 백제의 옛수도인 하남위례성이며 그 역사적인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김부식 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는 “十三年 秋七月, 就漢山 下立柵, 移慰禮城民戶”(온종왕 13년 가을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서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로 되어 있고, 일 연이 지은 “‘삼국유사’ 권2 남부여·전백제조”에는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 廣州). 歷三百八十九年”(14년 병진에 도읍은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다)고 되어 있고, 다산 정약용은 “‘慰禮考’(위례고)에서 전에 막연하게 광주 남한산하로만 알려져 오던 하남위례성은 남한산의 북록하(北麓下) 지금의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 일대의 속칭「고골」로 불리는 광주고읍(廣州古邑- 현 하남시 고골)이라고 하였다”
20여 년 전에 부관(釜關)페리호를 타고 한·일 지식인들이 한·일 역사에 대하여 선상토론(船上討論)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일본인들이 이론적으로 밀리니까 우리학자에게 마구 욕설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우리나라 소설가 최인호씨가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
"왜 욕을 할까?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일본역사를 탐방,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역사소설을 썼다. 잃어버린 왕국이란 바로 백제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만주)의 글자를 조작해서 일본역사가 한국보다 앞섰고 따라서 옛날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백제왕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층을 구성하였고, 많은 문화를 전수하였다.
“‘6세기 초 개로왕의 아우가 왜왕(倭王)에 즉위’하였고, 국보 ‘스다하치망 거울’ 등이 물증(物證)”이라고 공주대 ‘와다나베’ 객원교수가 주장한 바 있다(1991년).
현재 일본소재 백제신사(百濟神社)에서 받드는 신주(神主)의 이름과 부여서씨(夫餘徐氏) 문중에서 보관중인 족보상에 역대조상 즉, 백제시조 온조왕으로부터 의자왕까지의 이름이 동일하다.
하남시의 “자연적·역사적인 자원의 관광 상품화 고려”를 제안한다.
우리나라의 백두산 관광객은 꾸준하다. 그 이유는 경관이 빼어나서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최고봉이어서 영산으로 생각하고, 애국가 가사에도 있는 등 상징성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백두산의 일부분이 현재 우리의 국토가 아닌 중국에 속해 있어서 중국쪽을 통해 가는 것이다.
필자도 중국을 통해 2회 다녀왔으나 헌법상 영토조항(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을 생각하면 심정이 착잡하다.
‘고골’은 약 400년 간 ‘하남위례성’이었다. ‘하남시’라는 명칭도 이 역사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는 과거 일본지도층의 뿌리인 온조왕을 연상, 의미있는 도시다.
고골의 유물·유적인 이성산성, 향교고개 철불과 전설, 사리고개 석불, 항동의 석문자(石文字)와 법륭사 필적(일본 법륭사 벽화 문자와 필법 동일), 춘궁동 3층·5층 석탑 및 동사지, 고골 동쪽 새미골·서쪽 벌미재 두 곳에 있는 ‘S’자 형의 방어시스템(일본 구마모도현<熊本懸> 기쿠치성<鞠智城>의 토루<土壘>와 유사), 하사창동에서 발굴된 국내 최대(最大)의 철불(鐵佛), 기타 백제초기 유물·유적을 복원하여 관광할 수 있도록 도로 및 숙박시설 등 인프라를 구축해서 관광산업화하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기관의 심도있는 연구·개발·복원 있기를 희망한다.
조성국 칼럼리스트 cho-g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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