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1919년 이화학당 시절 친구인 유관순 열사와 함께 3ㆍ1운동을 했던 통일정사(하남시 배알미동)의 보각스님(속명 이정수)이 24일 새벽 입적했다.
세수 103세. 법랍 49세.
보각스님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질곡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어온 시대의 증인이었다.
보각 스님은 이화학당 시절 자신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나이는 두 살 위인 유관순 열사와 5년간 한방을 쓰며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보각스님은 생전이던 2004년 7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50)수석연구원이 펴낸 ‘유관순’(520쪽·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고증을 맡아 3ㆍ1운동 당시의 상황과 유 열사의 활동상을 증언했다. 이때의 활동으로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유열사의 한자이름과 출생ㆍ사망일이 확정됐다.
보각스님은 3ㆍ1운동 당시 그때 돈으로 1원을 들여 종이와 빨간색 파란색 물감을 사서 태극기를 그렸다. 태극 도안은 밥공기를 엎어놓고 그렸다. 그러나 팔괘는 어떻게 그리는지 정확히 몰라 대충 흉내만 냈다. 당시만 해도 태극기를 본 사람이 많지 않아 정확한 모양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기숙사 방마다 붙여 다음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며칠 후 이화학당 학생들은 서울역에 나가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출가 이전 국방부인회장, 불교부인회장, 마야부인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던 보각스님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두 아들과 남북으로 떨어져 살게 돼 이데올로기로 인한 생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불가에 귀의한 보각스님은 암자 이름을 ‘통일정사’로 짓고 평생을 두 아들의 귀환을 기렸지만 결국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
빈소는 한림대병원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25일 오전 8시에 화장으로 치렀다.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스님은 부고를 알리지 말도록 해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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