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이전-생활/체육
독자투고= 조 성 헌 前 안성군수남한산성에서 삼전도를 바라보니

꽃샘추위도 풀이 꺽인 3월, 우리 일행은 남한산성 역사 탐방에 나섰다.

우리는 남한산성 전철역에 모여 신구전문대학옆으로 올라 난청지역 해소를 위한 방송국 중계소를 거쳐 남한산성 남문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이 산성에서 370년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려 서기 1636년(인조14년)의 남한산성을 체험해 보기로 했다.

당시 청나라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물밀듯이 남하해 서울을 목전에서 위협하는 상황에 처해 인조는 경황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서기 1636년 12월 15일 새벽이었다.

산성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와 비축되어 있는 식량에 대해 '남선'은 이렇게 보고한다.

"산성을 지킬 사람의 수는 종실과 삼의사 2백명을 포함해 1만2천명이고 식량은 1만4천3백여섬입니다. 이는 성안에 있는 사람이 평시라면 한달 정도의 물량이나 절약하면 두달을 버틸 수 있는 양입니다"

적은 말쭉거리쪽에서 수 많은 기치를 나부끼며 성을 포위하고 공세를 강화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인조는 "과인이 바야흐로 외로운 성에 갇혀 안으로는 믿을만한 형세가 없고 밖으로는 개미만한 후원조차 없으니 생사의 존망이 목전에 다다라 있다. 경들은 급히 군사를 거느릭 달려와 종사의 위중함을 구원하라"며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에게 비장한 내용의 파발을 보낸다.

그러나 이들의 원군들도 모두 적들에게 참패 해 성은 점점 고립무원이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장 먼저 잡초의 부족으로 군마들이 수십두씩 허기져 쓰러져 갔고 식량난은 계속됐다.

심지어 식량난에 부심하다 고육지책으로 죽은 말을 거두어 군병들에 먹이기 시작했다.

호조판서 김신국은 식량부족을 왕에게 고하고 전직 관원들에게는 양식의 배급을 중지 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탄식하며 "그들이 충심으로 나를 믿고 따라 왔는데, 어찌 박정하게 양식을 끊을 수가 있음이던가. 같이 먹고 같이 굶는 것이 인군의 도리일 것이오"라고 말한다.

이 소식을 듣고 성안의 백성들은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엔 혹한이 찾아왔다.

그해 12월은 몹시 추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혹한 혹한으로 동사자와 동상자가 속출했다.

배고픈 아사자와 동사자로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남한산성은 서서히 연옥과 같은 상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인조는 1637년(인조 15년)에 청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항전을 벌인지 꼭 45일만의 일이다.

지금의 한강 석촌호수 동쪽 1km 지점인 '산점도'에 수항단을 쌓고 청태종 '홍타이히'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를 올린 것이다.

이에 따라 인질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 등이 부인들과 함께 심양으로 붙들여 간다.

또 포로 60여만명과 매년 1만냥의 조공, 백금 1천냥 등을 보냈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땅을 쳐도 소용없는 일이었고 통곡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삼전도'를 바라보며 다시는 치욕의 역사가 없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조성헌씨

▷경기일보 창간5주년 기념 공모전 당선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제4회 연금생활수기 공모 당선 ▷'사색의 오솔길', '제3의 인생' 수필집 발간 ▷안성군수 ▷경기도 지역경제국장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교차로저널  kocus@kocus.com

<저작권자 © 교차로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교차로저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