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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 까지 성리학(性理學)과 주자학(朱子學)을 정치 이념으로 삼아 나라를 경영하여 왔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으나, 위정자(爲政者)들은 여전히 성리학과 주자학의 도덕적인 인간성을 강조하는 사상만을 고집하면서 나라를 이끌게 되니, 그것이 조선 중기까지의 논리로는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뜻있는 학자들은 성리학이나 주자학의 정치철학만으로는 나라가 언제 또다시 외침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될는지 모르겠으므로 새로운 정치를 위한 학문에 목말라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게 되고 또한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후세에 이 학문을 실학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개혁을 주장하게 되었고, 특히 숙종(肅宗) 이후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대에 이르러서는 임금도 사회 문화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던 전통적 유학(儒學)인 성리학의 이념적 체계를 가지고는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17세기 후반인 1680년경 미수(眉?) 허목(許穆)이 타계하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타계하면서 실학사상의 뿌리를 남겨놓게 되나, 18세기에 들어와서 실학은 전성기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때를 ‘문예부흥기’라고 부를 정도로 학문적 분위기가 활기차고 학구열이 충만 했던 것 같다.
광주부(廣州府) 월곡면(月谷面)의 성호(星湖) 이익(李瀷), 광주부 경안면(慶安面)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여주의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광주부 초부면(草阜面)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는 실학자들을 통 털어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하였다고 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순교(殉敎)한 녹암 권철신을 제외하면, 모두 광주 출신 학자들이어서 이 세 학자들을 광주학파(廣州學派)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은 학설이라고 볼 수 있다.
경세치용(經世致用)(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 다는 주장)
이용후생(利用厚生)(인간의
창조적, 기술적 지성을 도구로 하여 편리하게 쓰고 의식을 풍부히 하여 국민의 생활향상을 꾀한다는 주장)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고,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떠나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과학적, 객관적 학문태도를 말한 조선시대 실학의 큰 영향을 준
학설)
이처럼 조선 후기 실학이란 학문은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으므로 광주가 실학의 메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광주는 옛 영역이 급변하는 사회구조에 맞추기 위하여 여러 곳으로 분할되었으나, 지금 어떤 이름으로 그 지역이 변했던지, 역사속의 광주(廣州) 인 것 만 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며,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안타깝게도 옛 광주 땅이 지금은 남양주의 한 모퉁이로 편입 되었다 하여 실학이 남양주가 본거지라고 주장하는 실학의 역사를 왜곡하는
처사가 발생하여, 당초 광주에 경기도 실학박물관을 건립키로 협약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계획을 부당하게 변경하여, 남양주의 유원지로 입지를
바꾸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광주에서 이를 반대하고 당초 계획대로 광주에 실학박물관이 건립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실학정신을 현양하는 일이고
순리라는 시민운동이 벌어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교차로저널 kocus@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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