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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조는 하남시와 인접해 있는 북문에 올라 진두지휘하면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200여명의 적군을 쓰러 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청나라는 이와 같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조선의 군사를 힘으로는 당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산성으로의 식량공급을 막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하남시 상사창동 지역의 법화골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청나라 병사들이 노약병 약간과 많은 소와 말을 남겨둔 채 주력군을 가지리 방면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노출되었다.
이를 포착한 도제찰사 김류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3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성문을 열고 나가 소와 말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계곡에 군사를 매복하고 조선의 군사를 성에서 끌어내기 위한 청나라의 작전이었다.
결국 300명의 조선군사는 계곡에 매복되어 있던 청나라 군사에게 퇴로를 차단당하고 가지리 방면으로 이동하던 청나라 주력부대도 방향을 바꾸어 조선군을 공격함으로써 포위망 속에서 혼전을 전개 하였다.
조선군이 위기에 빠지자 뒤늦게 퇴각을 명했지만 이미 많은 병사들이 육박전을 벌이고 쓰러져가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병사들은 300여명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 전투는 조정에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명분을 제시하였고, 성내의 여론은 급격하게 화친쪽으로 기울여져 갔다.
300여명의 병사들이 전사한 현장에는 지금 조그만 표석이 세워져 그 옛날의 장렬한 최후과 안타까운 순간을 전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하남시와 광주시, 성남시등 3개 지역에 모두 연결되어 있는데, 지리적으로 한강을 끼고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군사전략상 주목을 받아 오던 곳으로 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 하였던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은 조선시대에 쌓은 것으로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고 예부터 주장성,일장성,일장산성등으로 불려왔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한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2년)이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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