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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향교는 이전해 온 것으로 본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1846년(헌종 12년)에 간행된 홍경모의 '중정남한지'에는 "본래 고읍(古邑)서쪽 2리에 있었는데 1703년(숙종 29년)에 광주부윤 이제가 고읍터로 이건 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북쪽으로 10리길'이라고 하였으므로 이 기록에 의하면 향교고개 방향으로 2리쯤 떨어진 곳이 원래의 향교자리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고읍이란 광주관아 즉, 광주관청이 있던 자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의 향교터에 있던 광주관아가 1626년(인조4년) 남한산성으로 옮겨가고, 그로부터 약 70-80년 후에 서쪽 2리에 있던 향교를 이곳으로 이전 했다는 것이다.
향교의 건물은 성균관을 모방하였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도 대성전과 동.서무를 두고 선현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명륜당과 동.서재를
두어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광주향교의 주건물인 대성전은 주심포집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 벽에는 풍판이 달려 있다.
대성전에는 5성(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동.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은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당을 두고 좌우에 동실과 서실을 두었다. 서재는 맞배지붕 건물로 온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 그외 수복실(守僕室)과 외삼문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향교의 주기능은 제사와 교육이었는데 제사는 춘추제전가 삭망분향,고유제,위안제,서원제등의 제의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행해 지는 것은 석전제(釋奠祭)와 삭망분향이고 그 이외의 제의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이뤄진다.
또한 향교는 지방의 유일한 관학이었으므로 조선초에는 지방교육의 중심이었다. 또한 향교보다는 초급의 교육기관으로 서당이 있었고 고등과정으로는 중앙의 성균관이 있었다.
향교에서의 교육기간은 대개 4년이었으며 1년차에는 소학,대학,시전 2년차에는 논어,서전,가례, 3년차에는 맹자,주역,심경, 4년차에는 중용,예기,근사록을 공부했다.
현재 광주향교는 지속적인 발굴작업이 진행중에 있으며, 남아 있는 옛 문헌들은 '청금록(靑衿錄), 유안, 선생안,향장안등의 인명부를 비롯해
향교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록한 기(記)와 정문, 완문,양안등이 남아있어 어떤 인물들이 광주향교에서 배출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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