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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로 전처 소생에서 고구려의 태자가 된 온조왕은 태자 책봉 이후 동복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비류는 미추홀(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서울부근 또는 광주 부근으로 추정)에 도읍을 정해 국호를 십제라 했다고 전한다.
얼마 후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며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온조가 백제의 시조로서 위세를 떨침을 입증하는 문헌이 전해진다.
남한산성의 숭열전은 이러한 백제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이다.
산성내 일장산 중턱에 건립되어 있는 숭열전은 온조왕과 함께 산성 축성당시 총 책임을 맡았던 완풍군 이서를 배향하며 매년 봄과 가을에 2회 정제하고 향축은 예조에서 보내왔다고 한다.
당초 온조왕 만을 모시던 숭열전은 조선조에 와서 이서를 함께 모신다.
숭열전에 전해오는 일화에는 "조선조 제22대 정조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치하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귀신 하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한사람 같이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정조가 곧 축성시의 공로자 이서를 종사케 했다"고 전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 산성 축성시 총 책임자였던 완풍군 이서를 함께 배향종사하고 있는 숭열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인조 16년(1638)에 지어져 정조 19년(1795)에 숭열이라고 사액돼 보호되고 있다.
본당은 좌우측에 아래 단이 둥근 형태를 한 방풍 벽을 갖은 맞배지붕 형식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를 둘렀으며
정면 3칸에는 여닫이 4쪽의 격자문을 달았다.
주춧돌은 둥글게 잘 다듬어 그 위로 민흘림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포의 형태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강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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