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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위해 목숨 바친 4명의 충신 모셔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영정 안치

[하남]하남시에 남아있는 사충서원은 신임사화(辛壬士禍)때 죽은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제사 지내기 위해 1725년(영조 1년)에 과천 노량진에 설립 되었던 서원이다.

조선후기 정치적 격동기에 살았던 이들 4사람은 사색당파의 노론에 속한 분들로 영조가 왕우를 계승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 하다가 소론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서 옥에 갇히고 급기야는 목숨을 잃게 됐다.

이들 4사람의 뜻과는 달리 소론에서 주장하는 대로 경조가 즉위 했지만 불과 4년 만에 경조가 세상을 뜨게 되자 노론과 소론의 입장은 급변하게 된다.

경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4사람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서 '사충서원'이라고 이름한 서원을 하사했다.

   

사충서원은 1726년 사액서원이 되었지만, 이듬해인 1727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들어서자 4사람을 다시 죄인으로 만들고 서원도 따라서 철폐 됐다.

그후 1740년 경신처분으로 영조가 노론의 행위가 옳았음을 천명하자 그들은 다시 충신으로 판명 되었다.

그러나 서원은 곧 바로 세워지지 못하다가 1756년 복설 되면서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사충서원의 4사람은 정권의 부침에 따라서 죽은 후에도 자신들이 운명이 충신과 역적을 오고 갔던 비정한 운명을 맞이했다.

사충서원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되지 않고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 였으며, 1927년 사충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 되면서 현재의 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기게 됐다.

그러다 1952년 6.25 전쟁으로 서원이 파괴 되었고 1968년 사림의 주선으로 당시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충서원의 경우, 현재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삼문(三門), 현판, 묘정비, 4대신의 영정, 서원을 관리하는 건물이 있다.

사충서원 현판 글씨는 당시 명필인 김충현이 쓴 것이며, 사단법인 제 27호로 등록되어 있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의 당나라 말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체계화 된 것은 송나라 때에 주흭 백록동서원을 열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에는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중국의 서원이 관리의 양성을 위한 준비기관으로 학교의 성격을 유지 했지만, 조선의 서원은 향촌사회와 사림의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하여 기능과 성격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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