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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0년 관용자기 제작을 전담하던 곳1884년 상업자본가에 의해 민영화로 전환

   

팔당댐을 넘어 45번 국도와 337번 국도를 번갈아 타면 백자도요지로 유명한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닿게된다.

 지금은 백자도요지보다 붕어찜 마을로 유명해 음식점들로 어지럽지만 수세기 동안 마을 전체가 궁으로 들어가는 그릇과 도자 생산을 전담하던 유서깊은 지역이 이곳이다.

분원리는 조선왕조 궁중에 들어가는 그릇을 굽던 '사옹원'이 있던 곳으로 정조 20년(1796) '사옹원은 분사를 광주에 설치하여 자기를 굽도록 하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분원이라는 지명도 사옹원의 분사인 '분사옹원'이 약자로 분원이 된 것이고 기록상에도 분원으로 많이 남아있다.

또, 분원사기란 예전 광주분원에서 만든 도자기로 백자 등 여러종류의 자기가 생산되었고 고요지는 분원초교 중심부에 있었는데 지대가 높은 곳으로 갈수록 상질의 파편이 발견돼 고요일수록 고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의 역사를 유일하게 명시하고 있는 '남한지'에 의하면 "본주의 물산을 살펴보면 곳곳에 고루 있지만 자기는 매년 춘추로 사옹원 관원이 어용지기의 제조를 감독한다. 어용의 자기가 우리나라에서는 제일인데 그 곳을 번조소라 이름하고 뒤에 '양근'으로 옮겼다"고 쓰여있다.

여기서 양근이란 예전의 남종면이 양근군 관할이었으나 1914년에 광주시로 편입됨에 따라 지금의 남종면을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남종은 자기 번조에 종사하던 사기장이 무려 380명 정도나 되며 이들 장인들은 자기 제조를 위해 분원 주위에 따로 1개 촌락을 형성해 살아왔고 이에 딸린 권속과 기타 인구를 합치면 1천여명이 하나의 촌락을 이루어 생활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사옹원 사기장 자손들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그 업을 세전하게 되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남아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분원에서의 사기 번조는 17세기 후반부터 공장들의 생계를 조금 보조하는 의미에서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여기에 상인자본이 개입해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점차 증대돼 조선조말인 고종 21년(1884)에 결국 상업자본가에 의해 민영화로 전환된 것으로 전해진다.

   

강인호 기자  kai76@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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