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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역사를 유일하게 명시하고 있는 '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해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전한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았으며 성가퀴는 1,700첩, 4문과(門)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해 모든 시설을 갖추었으며 7개의 절까지 세워져 현재 광주시 뿐만 아니라 역사의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원형은 물론 도심속의 문화유적으로 점차 확대돼고 있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축조 역사에는 '이회'라는 조선시대 인물이 등장한다.
또 그를 모신 사당이 남한상성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역사적으로도 후세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회는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성의 동남쪽을 맡았던 공역의 책임자다. 그러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안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쌓는 일을 도와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 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죄가 밝혀졌고,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한 것이 청량당이다.
본당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 우편에는 벽암대사와 이회의 처첩 초상화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원래의 것은 6·25전쟁 때 분실되었고 지금 있는 것은 그뒤 새로 만든 것으로 현재 해마다 한 차례씩 지방 무속인들이 제사를 지내며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불려지고 있다.
강인호 기자 kai76@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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