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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학정이 하늘을 찌를 듯 하던 조선시대.
일반 백성은 물론 관직에 있는 그 누구도 광해군의 학정에 맞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광해군과 맞선다는 것은 곳 죽음 또는 귀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오히려 학정에 동조하는 것이 몸을 보호한다는 것이 관료들의 판단.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에 이어 인목대비의 폐위가 거론되자 전면에 나서 반대 움직임을 만들어 냈던 사람이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충신 신립장군의 둘째 아들 신경유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거사에 참가 해 큰 공을 세우니 그 공으로 경기도 수군절도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한다.
지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광주시 도척면 진우리에 영정을 모셨으니, 현재 신경유의 영정은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신경유(1581∼1633)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과 동평군(東平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이후 황해도병마사와 충청도 및 전라도병마사를 지낸 무신이다.
자는 자관(子寬),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도순변사(都巡邊使) 입(砬)의 아들이고 영의정 경진(景 )의 아우이다.
초상화의 크기는 169㎝×90㎝로, 오사모(烏紗帽)에 정장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인데, 사모의 높이가 무척 낮고 공수(拱手; 공경의 뜻으로 두 손을 마주 잡음)를 한 양손사이에 흰 속옷 소매가 보이고, 족좌대(足座臺) 위에 한껏 벌린 양 발, 그리고 바닥에 깔린 화려한 채전(彩氈)은 모두 17세기 공신상의 특색이다.
그러나 초상화에 나타난 학정금대(鶴頂金帶)의 해태문양 흉배는 무관 종2품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것은 이 초상화가 정사공신 책록 후 곧바로 제작되지 못하고 그가 황해도병마절도사에 오른 뒤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얼굴처리에서 이마의 중심과 양뺨을 마치 짙은 연지로 물들인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과 오른쪽 단령의 트임새에 내비치는 내공(內工) 및 첩리(帖裏)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점 역시 시대가 내려가는 특징이다.
정사공신 녹권은 인조반정 이후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신경유는 1625년(인조 3)에 2등에 책록되었다.
크기는 193㎝×37㎝가 되는 두루마리로 사주주선(四周朱線)을 긋고 상하단의 선은 좌우단 주선보다 약간 굵으며 사주 안에 76개의 계선을
긋고 그 안에 내용을 묵서로 기재하고 있다.
이규웅 기자 aa5767@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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