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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위기에 처해있는 마당에 적지에 끌려 가 온갖 곤욕을 치른다면, 당사자는 암울한 미래에 몸이라도 추스려야 한다는 약한 마음을 갖는 것이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구국의 충절로 죽음을 택했으니 이세백으로서는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삼학사로 알려진 홍익한, 윤집, 오달재 이 세명이 이세백이 후세에 역사를 알려야 한다고 손 꼽은 주인공들이다.
이 세명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숙종 14년(1688)에 이세백이 목조물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지으니 지금은 경기도유형문화제 제4호로 지정되어 일반인들의 방문을 맞이하고 있다.
삼학사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항복과 청을 도울것을 요구받았지만 심한 곤욕에도 끝까지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재물 등으로 회유하는 것 역시 삼학사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책질과 회유에 미동하지 않은 삼학사에 대해 청나라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삼학사.
그 뒤에는 이세백이 있었기에 그나마 위로가 됐을 것 같다.
현절사는 삼학사가 충절한 뒤 역시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거부 한 김상헌, 정온 두 충신의 위패도 1699년부터 같이 모셨다.
남한산성 동문 안 북쪽 산기슭에 자리한 현절사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수도 서울을 지키고 있는 듯 하다.
비록 건평이 6평밖에 되지 않은 외소한 형태이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죽음으로서의 나라 사랑'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지난 1974년 본전은 한식 목조 단층으로 복원됐지만 1978년에 재차 복원작업에 들어가 3평 정도의 온돌을 보수하고 문짝을 다시 달았다.
내삼문에 있던 자리에 세원진 일주문도 도괴되어 1978년에 복원됐다.
이규웅 기자 aa5767@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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