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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53년만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고 김재진선생, 하남시 김의관씨의 조부
   
 
  ▲ 1921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정의단사건 공판' 이라는 제목의 독립운동관련 재판기사에는 일본검찰이 구형한 형기중 김재진 선생에 대해서는 징역8년을 구형한 내용이 기사내용 끝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독립만세운동으로 첫 옥고를 치른후 1920년의 '독립자유회사건'과 '독립정의단사건'의 주모자로 일제로 부터 추적을 받고 8년간 감옥에 갇혔던 독립운동가가, 후손의 노력으로 53년만에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고 15일 오전 수원시 경기도문화예술회관에서 포상전수와 훈장을 수여 받았다.

화제의 주인공은 평안남도 평원군 동성면 수암리가 고향인 고 김재진(金載珍)옹과 그의 손자인 김의관씨(59.하남시 덕풍2동 356-7번지.대덕수퍼 운영중)

 

1919년 3월 4일 오전.

평안남도 순천면 자산장터에서는 1천여명의 조선인들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의 무리 속에는 김재진씨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본경찰에 잡혀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됐고 8개월간의 첫 옥살이를 하게된다.

그는 이 형무소에서 함께 투옥된 많은 독립투사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동아일보사의 색인 인명록에는 김씨에 대해서 "배일운동,항일투쟁,군자금모집운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는 1921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기사를 근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씨는 출옥후 '독립자유회'를 결성해서 일본경찰의 추적속에서도 체포 되지는 않았지만 , '독립자유회' 회원들이 모두 일제에 체포되서 조직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독립정의단' 이라는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어서 활동 하다가 1921년 체포돼서 8년간의 옥고를 치르게된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 첫 아들이 태어나자 감옥에 있는 동지들과 상의 해서 만든 첫 아이 이름이 시환(時奐) 이었다.
'때가 되면 빛 날 것이다'는 의미로 조국의 광명을 암시하는 뜻이 담겨 있는 이름 이었다.
조부의 독립운동사실을 추적해서 훈장을 수여한 김의관씨는 그 김시환씨의 외아들이다.

김재진 선생이 8년간의 감옥생활을 하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많은 동지들이 첫 마음을 잃고 일제의 협력자가 되어있는 현실을 보고서, 1931년 충남 대덕군 탄동면 추목리로 온 가족이 조용히 이사했다.

이때부터 1950년까지가 김재진옹을 비롯한 온 가정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으로 6.25전쟁이 일어나서 인민군이 내려오고 김재진 선생은 빨갱이들에 의해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후 1951년 처형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 김재진 선생의 그때 나이가 74세였다.

김의관씨의 부친 김시환씨도 인민군에 의해서 끌려간후 종적을 알 길이 없어서 사망한 것으로 가족들은 알고있다.

조부와 생부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여서 온 가족이 힘든 질곡의 세월을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서 독립운동가의 손자인 김의관씨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도움으로 국가보훈처에 확인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매일신문의 마이크로필름을 뒤진 끝에 조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1921년 9월 28일자 '독립자유사건'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내용중 일부는 이러하다.
"... 오래국은 작년 오월중에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사인장의 김재진 방에서 독립신문 이십장과 급고문(急告文) 이십장과 군자금영수증 아홉장을 받은 후 본년 사월 칠일에...)

독립운동가 고 김재진옹의 손주로,  대신 훈장과 포상을 전수받은 김의관씨는 "15일 저녁에
푸짐한 잔치상을 차려서 온 동네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눌 계획이다"면서 기뻐했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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