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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동 선사유적지 시굴조사 성과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 삼국 고려 조선까지 문화층
신석기∼청동기, 초기 삼국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취락지가 발견된 하남시 미사동 선사유적지에 대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26일 개최됐다.

‘동아시아에서 미사동 유적의 위치’란 주제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는 최정필 세종대학교 박물관장, 중국 변녕성문물고고연구소 방전춘교수, 일본 동경성여자대학 나가야마 교수, 국내 유명교수 등 10여명의 석학이 대거 참석해 토론을 펼쳤다.

이번 학술 심포지엄은 하남 미사동 유적의 효율적인 보존·관리와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세종대학교에서 발굴한 미사동 유적지 발굴결과를 놓고 주변국가인 중국과 일본 등의 비교를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미사동 유적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립하는데 있다. 지난해 시굴조사를 바탕으로 미사동선사유적지의 현황과 발굴유물 등을 정리한다.

중부지역 대표적 신석기시대 유적

하남 미사동 유적은 한강 상류의 강굽이 현상으로 형성된 충적대지인 섬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한 미사섬은 현재 남북 3km, 동서 1km쯤 되는데 이 지역의 원래 지형은 남북쪽이 긴 타원형의 섬으로 동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그 반대쪽에는 샛강이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올림픽에 대비하여 샛강을 막아 조정 경기장을 만들면서 미사동유적 주변의 한강 물 흐름이 빨라지고, 홍수에 의하여 침식이 심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1986년부터 1989년 사이에 한강종합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호안 축조공사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은 과거와 큰 차이가 있다.

미사동 유적은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유역은 물론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며, 한강쪽의 유적 일부분이 79년 사적 제26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유적 주변지역이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주택과 축사의 건축이 무분별하게 난립되고 있어 유적의 파괴 또는 적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미사동유적에 대한 관심은 50년대 후반부터 고려대학교 인류고고학회에서 실시한 한강유역에 대한 조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미사동유적과 이웃에 위치한 구산 일대에 대한정밀조사가 실시되어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수습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시굴조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 60년 김원룡박사가 미사섬의 북쪽 단애면이 드러나 퇴적층과 그 주변에 대한 간단한 시굴조사를 실시한 다음,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간석기를 학계에 보고하였다. 그 다음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중심으로 미사리유적의 북쪽 단애면에 대한 몇 차례의 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찾아진 유물을 중심으로 소개되었으며. 이때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암사동유적과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미사섬의 동북쪽에 실시된 80년의 발굴조사에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등 4개 대학에서 조사에 참여하였으며, 미사동유적의 문화층이 신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까지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다시 한번 유적의 중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렇게 좁은 지역의 한정된 조사로는 미사동유적의 범위와 성격 그리고 문화층의 해석에 대한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이 제기되었다.

한편 87년부터 92년까지는 숭실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8개 조사 기관이 참가하여 시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한강 종합개발사업에 따라 3차에 걸쳐 이루어진 대규모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초기 철기시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문화층이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미사동유적을 통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문화변천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임이 다시 밝혀졌다.

그 이후 98년과 2000년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는 하남시 문화유적 조사의 일환으로 미사동유적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지난해에는 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조사 과정과 내용

하남 미사동유적에 대한 시굴조사는 유적 주변의 지형변화가 예상됨에 따라 먼저 사적으로 지정된 미사섬 북쪽(미사동557-1번지 일대)의 지정 지역 가장자리의 국유지와 현상 변경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민원 대상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사 방법은 지번의 형태에 따라 시굴 구덩을 설치하고 겉흙을 걷어낸 다음 유구를 확인하면서 아울러 그 범위 파악을 위하여 부분적으로 확대 조사를 하였다. 시굴 조사 결과, 사적 지정 주변지역(미사동 576-5~567-1번지?570번지)에서만 유구와 유물이 찾아졌고 민원 대상 지역에서는 유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미사동 유적의 층위는 각 시굴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광범위한 지역이기에 하나로 통일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침식과 퇴적이 반복적으로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 깊이는 4.57m이다.

미사동 567-5~7번지 지역

조사 전 이곳은 민가와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는데 도랑 유구 4기와 빗살무늬토기 등이 찾아졌다. 유구와 유물의 분포 상태를 보면 조사 지역의 중앙과 서북쪽에 자리하며, 조사된 유구의 일부분은 조사 대상 지역의 바깥까지 연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랑[溝] 유구=암갈색 모래층(5층)인 청동기문화층에서 찾아졌는데 부분적으로 물이 흘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구의 안팎에서 민무늬토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작은 조각이고, 밑부분과 입술이 남아 있는 것은 몇 점에 불과하다. 도랑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너비는 약 30~50cm이고 깊이는 30cm 안팎이다. 도랑의 형태와 경사도로 보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이 흘렀던 것 같으며, 유구의 대부분은 시굴 구덩 바깥인 남쪽에 묻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도랑 유구(II)=이 도랑 유구는 앞의 도랑 유구보다 규모가 크고, 민무늬토기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는 대부분 도랑의 가운데와 양쪽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으며, 바리(鉢)모양의 민무늬토기 1점이 깨진 채로 출토되기도 했다. 도랑의 평면 형태는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방형이며, 너비는 50~100cm이고 깊이는 30cm쯤 된다. 이 도랑 유구도 대부분 시굴 지역의 바깥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져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하여 확대 조사가 필요한 실정이다. 한편 빗살무늬토기는 90~10층 사이에서 출토되었으며, 모두 작은 조각이다.

미사동 567-1번지 지역

이 지역은 비닐하우스에 의한 경작으로 지형의 변화가 계속되고 있어 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초기 삼국시대의 집터 1기(基)를 찾았다. 집터의 평면은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출입구 시설이 파괴된 상태이며, 크기는 길이가 5.5m, 너비가 4.2m쯤 되고 긴 방향은 북동쪽이었다. 불탄자리는 가운데 부분에서 발견되었고 기둥구멍 자리는 찾아지지 않았다. 집터 안에서는 경질의 민무늬토기조각과 철제 가래 1점이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는 모두 조각이며 밑 부분과 몸통 부분이 섞여 있다.

이런 철제 가래가 보고된 유적으로는 황해 운성리 2호 무덤·충주 하천리 유적·김해 양동리 113호 무덤과 서울 구의동유적(5∼6세기)·몽촌토성·석촌동유적 그리고 최근 조사된 보성 조성리유적 등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미사동에서 발견된 이 철제 가래는 형태와 집터의 구조·토기 등으로 보아 한강유역의 다른 유적에서 찾아진 것보다 시기가 약간 빠른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집터의 동쪽 옆에서 야외 화덕자리로 해석되는 구덩이가 찾아졌고, 집터 북쪽 밖에서 단지 1점이 출토되었다. 야외 화덕자리는 타원형으로 가운데 부분이 검게 탔으며, 숯과 함께 불탄 곡물(팥 등)이 확인되었다.

미사동 570번지 일원

이 곳은 1990년 초에 발굴되어 사적으로 확대 지정된 지역과 바로 붙어 있는 곳이며, 한강변에 만들어진 제방의 남쪽 밭 경작지이다. 이 지역에 대한 조사는 12개의 시굴 구덩을 설치하여 유구와 유물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시굴 구덩의 대부분은 청동기문화층까지 조사하였지만, 그 가운데 몇 개의 구덩은 신석기 문화층까지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화덕자리와 굴립주로 해석되는 구멍 자리 그리고 도랑 유구 등이 찾아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빗살무늬토기조각과 제기형 붉은 간토기조작과 그물추, 입숭은 위쪽에 골○○○무늬가 있는 토기 조작 및 구멍무늬토기 조각 등이 있다.

▶불탄자리=12구덩의 신석기문화층에서 강돌로 만들어진 화덕 시설과 숯조각이 조사되었다. 화덕 시설은 당돌을 사용하여 직사각 형태로 만든 후 그 주위에 불을 피운 것 같으며, 불에 그을린 돌도 포함되어 있다. 불탄 나무는 남서쪽 모서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집터와 직접 관련된 것인지는 앞으로 자세한 조사를 통하여 밝혀져야 할 것이다.

▶굴립주 유구=1구덩에서 조사된 것으로 4개의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멍은 1990년대 초반 조사 때 숭실대·고려대 발굴지역에서 지상가옥으로 조사된 예가 있다. 구멍의 간격은 1.9 정도이고, 구멍 지름은 40∼47cm이며, 깊이는 35cm 정도이다. 그리고 동쪽 벽에서는 도량 유구의 일부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화덕 자리=2구덩에서 조사되었는데, 그 형태는 긴 타원형이다. 안쪽에서는 약간의 숯과 토기조각이 드러났으나 집터와 직접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야외 화덕자리인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화덕자리의 주변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고 이곳의 층위가 청동기문화층이므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어진다. 화덕자리의 크기는 길이 1.5m 정도이다.

조사 성과와 의의

미사동유적의 범위 타악과 경작으로 인한 지역 변화 지역을중심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조사 대상 지역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부근의 국유지와 밭 경작지 그리고 미사동 입구의 민원대상지역이며, 대부분의 유구와 유물은 사적지역으로 지정된 곳 부근에서 찾아졌다.

▶시굴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의 화덕자리와 청동기시대의 구덩, 도랑 유구 그리고 초기 삼국시대의 집터와 굴립주 유구가 발견되어 1990년 초의 발굴과정에서 조사된 유구와 그 성격이 비슷하여 미사동유적의 성격 해석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유물도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초기 삼국시대의 집터에서 발견된 철제 가래와 곡물·경질 민무늬토기는 기원전후의 한강유역에 발달하였던 문화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하다. 특히 철제 가래는 그 제작시기가 주변유적보다 빠르며 한강유역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 초기 삼국시대 이후의 미사동유적에서 이루어진 경작 문제는 한강유역의 고대 문화성격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앞으로 부근의 이성산성·몽촌토성·풍납토성과의 비교검토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시굴조사에서는 미사동유적의 퇴적관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사섬의 형성에 대한 지진학적 분석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결과로는 섬의 남서쪽에 샛강이 흘렀던 것 같으며 퇴적관계로 보아 습지성 물줄기가 상당히 오래 기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사섬 크기와 퇴적은 기존의 여러 의견 및 연구 결과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이 문제는 공동연구기관인 한국자원연구소에서 퇴적관계 분석을 진행하고 있으므로 보다 자세한 연구 결과가 밝혀질 것이다.

▶미사동유적의 시기별 연대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연구방법으로 현재 고지자기 측정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사동유적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절대연가가 제시되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시굴 구덩에서 얻어진 자료를 중심으로 지층별 연대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번 시굴조사에서 찾아진 숯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하고 있다.

▶이번 시굴 조사 결과,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유구와 유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에는 경작으로 인하여 계속적인 지형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한편으로는 민가의 신축 민원 신청이 증가하고 있기에 유적의 범위 파악이 시급한 실정이다.

미사리유적의 중요성

유적이 위치한 한강 일대는 거주하기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 이래로 많은 유적이 연속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유적은 한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침식과 퇴적의 반복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러한 이유로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유구가 층서를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수년에 걸친 미사리유적의 조사를 통하여 미사리유적은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장기간 동안 유적이 점유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 미사리유적은 한강유역의 장기간의 연속적 문화변천상 규명, 특히 대규모 취락지와 밭 유구 등을 통한 당시의 실생활상 연구에 더 없이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영일 기자  ondesk@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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