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민영화 돼 지나친 상업화로 쇠퇴
그동안 역사속 베일에만 가려져 있던 사적 314호 조선백자 분원 도요지의 가마터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광주시는 이번 2001세계도자기엑스포 기간중 남종면 분원 관요지 발굴사업(이화여대 박물관)을 추진, 도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생생한 역사현장인 발굴현장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우리 민족 도자문화의 발자취를 재조명한다.
◇광주분원 도요지
분원은 관용자기와 왕실용 어기번조를 소관하던 사옹원의 '분사옹원'을 약칭한 것으로, 기록상으로도 흔히 '분원'이란 이름을 많이 썼으며 분주원이라 개칭되기도 했다. 사옹원에서 왕실용 어기번조를 맡아본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태조 1년(1392)에 사선서를 설치했다가 이것을 사옹방으로, 그리고 세조 13년(1467) 사옹원으로 개칭해 조선말까지 존속했다.
여지도서 양근군조에 따르면 광주 번조소를 남종면으로 이설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고 하며, 매년 춘추로 사옹원 관원이 어용지기의 자기 제조를 감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날 분원에서 만든 분원사기는 백자, 염부와 유리유, 진사, 염부와 철사의 2채, 염부와 철사, 진사의 3채 등의 자기가 생산되었다. 도요지는 현재의 분원초등학교 중심부에 있었으며 지대가 높은 곳으로 갈수록 상질의 자기파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요일수록 고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곳 분원에서 자기번조에 종사하던 사기장은 380명 정도 였으며 이들 장인들은 가지제조를 위해 분원 주위에 별도의 촌락을 이루어 살았는데, 이에 딸린 권속과 기타 인구를 합치면 거의 1천명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옹원의 사기장 자손들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지 않고 그 업을 세전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분원에서의 사기번조는 17세기 후반들어 공장들의 생계를 약간 보조하는 의미에서 사번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고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여기에 상인 자본이 개입해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점차 증대, 고종 21년(1884년)에는 결국 상업자본가에 의해 민영화로 전환되었다.
분원은 19세기 후반부터 시대 조류에 맞는 시정 방향을 모색했으나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된 이후 쇠퇴해 폐지의 운명을 맞았다.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란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태조 원년(1392년) 사옹방으로 불리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사옹원으로 개칭해 조선조 말기까지 존속해왔던 중앙기관으로 왕실어기와 궁중음식 등을 관장하던 곳이다.
영조 26년 '속대전' 기록에 의하면 '사옹원의 번조자기는 1년에 2번 진상한다'고 규정해 놓았으며 사옹원의 직제는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4인→부제조(副提調)5인으로 했다.
◇분원(分院)이란?
분원은 사옹원의 하급기관이다. 광주는 사옹원의 분원지로 왕실어기만을 제작하도록 특별히 지정되었던 곳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옹원의 분원 사기장이 380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인조 3년 7월의 기록에는 2명씩 봉족이 있어 총 1천140명이 어기(御器)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기 충청 경상 전라도 등의 사기장이 모두 99명이 불과했던 점으로 보아 광주분원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토산조에 따르면 사옹원의 관리가 화원을 대동하고 분원에 내려가 어기에 시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종 2년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사옹원의 관리가 서리를 이끌고 가서 봄에서 가을까지 감독 번조해 어부에 수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선이 '우천도'(牛川圖)를 보면,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 우천리 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강 주변에 도자기 관요와 사기장의 집들이 잘 나타나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분원가마의 특징
세종때 이미 가장 정교한 백자생산지로 유명했던 광주백자 가마터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인 정선이 그린 '우천도'에 나타난 것처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 주변에 밀집해 있었다. 이 그림은 강 주변에 도자기 관요와 사기장의 집을 그려놓은 것인데 '우천'이란 지금의 분원리 앞에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현재는 팔당댐에 수몰되었다.
광주지역은 나무가 무성하고 한양이 가깝다. 그리고 한강과 경안천의 수운이 원료와 자기를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에 광주에 분원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광주분원 가마터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질의 백자파편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등록된 가마터만도 185개 이상 되지만 현재까지 벌굴된 것은 도마리, 번천리, 우산리, 선동리 등 4개 가마에 불과하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에는 자기번조시기를 기록한 묘지편 뿐 아니라 백자그릇 굽 바닥에 10년간의 간지명이 새겨진 사기편 등이 있어 분원자기의 연대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15세기 조선초기 도마리 가마에서는 중국과 한국적 양식이 혼합된 과도기적인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퇴촌면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양질의 백자파편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청화백자나 청자는 극히 소량 출토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우산리 가마에서는 갑변자기가 만들어 졌으며 이 갑변자기는 왕실에 납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천리 9호 출토품도 대부분 경질백자편이며 매우 정교한 파편들이 발굴되어 그 당시 뛰어난 자기제작 기술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전반기의 가마로는 유일하게 발굴조사된 선동리 가마는 자연구릉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반지하식 가마로 되어 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철화백자의 제작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철화백자편과 백자의 색이 회색으로 변한 조질백자편이 다량 출토 되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미화 840만불(약 99억원)로 세계최고의 가격에 낙찰된 철화백자용문항아리와 같은 국보급 철화배자 작품도 선동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으며 죽문, 포도문항아리 등의 국보급 철화백자 작품도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18세기 이후 분원의 가마터는 현재 발굴된 것이 없으며 명종 27년(1752)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광주 번조소가 남종면으로 옮겨져 매년 사옹원의 관원이 어기번조를 감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최후의 관요가 설치 운영되었는데 사옹원의 도제조와 번조관들의 공덕비가 그 곳에 남아 있다.
고종 21년(1884) 요업이 민영화 되면서 지나친 상업성 추구와 중국, 일본도자기의 과도한 수입으로 점차 도자기 제작기술이 쇠퇴하고 질이 저하되면서 투박한 백자가 생산되고 청화발색이 조잡해지면서 광주분원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역사속 베일에만 가려져 있던 사적 314호 조선백자 분원 도요지의 가마터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광주시는 이번 2001세계도자기엑스포 기간중 남종면 분원 관요지 발굴사업(이화여대 박물관)을 추진, 도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생생한 역사현장인 발굴현장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우리 민족 도자문화의 발자취를 재조명한다.
◇광주분원 도요지
분원은 관용자기와 왕실용 어기번조를 소관하던 사옹원의 '분사옹원'을 약칭한 것으로, 기록상으로도 흔히 '분원'이란 이름을 많이 썼으며 분주원이라 개칭되기도 했다. 사옹원에서 왕실용 어기번조를 맡아본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태조 1년(1392)에 사선서를 설치했다가 이것을 사옹방으로, 그리고 세조 13년(1467) 사옹원으로 개칭해 조선말까지 존속했다.
여지도서 양근군조에 따르면 광주 번조소를 남종면으로 이설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고 하며, 매년 춘추로 사옹원 관원이 어용지기의 자기 제조를 감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날 분원에서 만든 분원사기는 백자, 염부와 유리유, 진사, 염부와 철사의 2채, 염부와 철사, 진사의 3채 등의 자기가 생산되었다. 도요지는 현재의 분원초등학교 중심부에 있었으며 지대가 높은 곳으로 갈수록 상질의 자기파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요일수록 고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곳 분원에서 자기번조에 종사하던 사기장은 380명 정도 였으며 이들 장인들은 가지제조를 위해 분원 주위에 별도의 촌락을 이루어 살았는데, 이에 딸린 권속과 기타 인구를 합치면 거의 1천명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옹원의 사기장 자손들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지 않고 그 업을 세전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분원에서의 사기번조는 17세기 후반들어 공장들의 생계를 약간 보조하는 의미에서 사번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고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여기에 상인 자본이 개입해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점차 증대, 고종 21년(1884년)에는 결국 상업자본가에 의해 민영화로 전환되었다.
분원은 19세기 후반부터 시대 조류에 맞는 시정 방향을 모색했으나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된 이후 쇠퇴해 폐지의 운명을 맞았다.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란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태조 원년(1392년) 사옹방으로 불리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사옹원으로 개칭해 조선조 말기까지 존속해왔던 중앙기관으로 왕실어기와 궁중음식 등을 관장하던 곳이다.
영조 26년 '속대전' 기록에 의하면 '사옹원의 번조자기는 1년에 2번 진상한다'고 규정해 놓았으며 사옹원의 직제는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4인→부제조(副提調)5인으로 했다.
◇분원(分院)이란?
분원은 사옹원의 하급기관이다. 광주는 사옹원의 분원지로 왕실어기만을 제작하도록 특별히 지정되었던 곳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옹원의 분원 사기장이 380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인조 3년 7월의 기록에는 2명씩 봉족이 있어 총 1천140명이 어기(御器)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기 충청 경상 전라도 등의 사기장이 모두 99명이 불과했던 점으로 보아 광주분원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토산조에 따르면 사옹원의 관리가 화원을 대동하고 분원에 내려가 어기에 시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종 2년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사옹원의 관리가 서리를 이끌고 가서 봄에서 가을까지 감독 번조해 어부에 수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선이 '우천도'(牛川圖)를 보면,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 우천리 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강 주변에 도자기 관요와 사기장의 집들이 잘 나타나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분원가마의 특징
세종때 이미 가장 정교한 백자생산지로 유명했던 광주백자 가마터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인 정선이 그린 '우천도'에 나타난 것처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 주변에 밀집해 있었다. 이 그림은 강 주변에 도자기 관요와 사기장의 집을 그려놓은 것인데 '우천'이란 지금의 분원리 앞에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현재는 팔당댐에 수몰되었다.
광주지역은 나무가 무성하고 한양이 가깝다. 그리고 한강과 경안천의 수운이 원료와 자기를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에 광주에 분원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광주분원 가마터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질의 백자파편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등록된 가마터만도 185개 이상 되지만 현재까지 벌굴된 것은 도마리, 번천리, 우산리, 선동리 등 4개 가마에 불과하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에는 자기번조시기를 기록한 묘지편 뿐 아니라 백자그릇 굽 바닥에 10년간의 간지명이 새겨진 사기편 등이 있어 분원자기의 연대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15세기 조선초기 도마리 가마에서는 중국과 한국적 양식이 혼합된 과도기적인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퇴촌면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양질의 백자파편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청화백자나 청자는 극히 소량 출토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우산리 가마에서는 갑변자기가 만들어 졌으며 이 갑변자기는 왕실에 납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천리 9호 출토품도 대부분 경질백자편이며 매우 정교한 파편들이 발굴되어 그 당시 뛰어난 자기제작 기술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전반기의 가마로는 유일하게 발굴조사된 선동리 가마는 자연구릉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반지하식 가마로 되어 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철화백자의 제작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철화백자편과 백자의 색이 회색으로 변한 조질백자편이 다량 출토 되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미화 840만불(약 99억원)로 세계최고의 가격에 낙찰된 철화백자용문항아리와 같은 국보급 철화배자 작품도 선동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으며 죽문, 포도문항아리 등의 국보급 철화백자 작품도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18세기 이후 분원의 가마터는 현재 발굴된 것이 없으며 명종 27년(1752)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광주 번조소가 남종면으로 옮겨져 매년 사옹원의 관원이 어기번조를 감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최후의 관요가 설치 운영되었는데 사옹원의 도제조와 번조관들의 공덕비가 그 곳에 남아 있다.
고종 21년(1884) 요업이 민영화 되면서 지나친 상업성 추구와 중국, 일본도자기의 과도한 수입으로 점차 도자기 제작기술이 쇠퇴하고 질이 저하되면서 투박한 백자가 생산되고 청화발색이 조잡해지면서 광주분원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근영기자 young@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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