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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寒食)의 유래
  • 김세민 하남시사 편찬위원
  • 승인 2001.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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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5일은 식목일이자 한식(寒食)이었다. 한식은 옛날부터 설날·단오·추석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하나였다. 한식은 대개 음력으로 2∼3월경에, 양력으로는 4월 5∼6일경에 들어 있는데, 과거 나라에서는 이 날 종묘와 능에 제향하였고, 민간에서는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다. 지금도 그 전통은 계속되어 매년 한식날이면 성묘차량으로 서울 근교 도로가 막히곤 하는 것을 본다.
한식이라는 명칭은 글자 그대로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말인데,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충신 개자추에서 유래한다.
진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獻公)은 총애하는 비(妃)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융(驪戎)을 토벌하고 잡아온 여비(驪妃)를 특히 사랑하여 여비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신생(申生)을 죽이고 문공과 그의 아우 이오(夷吾)를 추방하였다. 문공은 적(狄)으로 도망하여 국외에서 19년을 유랑하다가 의형인 진(秦) 목공(穆公)의 주선으로 돌아와 62세에 즉위하였다. 문공은 재위기간이 불과 8년이었지만 신하 중에 현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齊)의 환공(桓公)에 이어 춘추전국시대 제2의 패자가 되었다.
그는 즉위한 후 많은 현신들을 등용하고 망명을 함께한 사람들이나 도와준 사람, 귀국을 환영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공평하게 논공행상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 문공과 함께 망명을 했던 개자추라는 충신이 논공행상에서 빠져 있었다. 개자추는 문공이 귀국한 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것을 불쾌히 여겨 벼슬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함께 청빈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망명생활 중 굶주린 문공에게 허벅지 살을 베어 먹였을 만큼 큰 공로가 있는데 왜 공을 내세워 벼슬을 하지 않느냐"고 개자추에게 물었다.
개자추가 말하기를 "헌공의 아홉 공자 중에서 문공이 가장 현명한 분이시니 오늘의 즉위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그것을 자신의 공로인 양 말하고 있습니다.
군주에 대해 탐천지공(貪天之功, 하늘의 공을 탐낸다는 뜻으로, 남의 공을 도용하는 것을 말함)을 다투는 것은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차라리 짚신을 삼으며 사는 편이 훨씬 즐겁습니다"라고 하였다. 개자추의 마음을 이해한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면산 깊숙히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며 살았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문공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개자추가 면산에 숨어사는 것을 알고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개자추가 끝내 나오지않자 불을 지르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면산에 불을 질렀는데,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그 후 불에 타죽은 개자추의 혼백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이 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인 명절로 숭상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기도 했지만 지금은 민간에서 성묘하는 이외의 행사는 모두 없어졌다.
이 문공과 개자추의 일화에서도 우리는 몇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사람이 잘된 후에는 과거의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야 하는데, 잘되고 나면 어려웠을 때를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문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굶어 죽을 뻔 했던 문공을 자신의 허벅지 살을 먹여 살린 것이 개자추이다. 어려울 때 입었던 은혜는 특히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다음으로 예나 지금이나 잘되면 다 내 탓이라고 떠들어댄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을 때에도 역시 너도나도 자신이
독립운동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주변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많다.

김세민 하남시사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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