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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창곡으로 비가(悲歌) 선정은 숙고(熟考)를…조성국 법학박사. 경민대 (前)교수· 도서관장. 국가유공자. (예)해병대위. 海幹 제34기
▲ 조성국 법학박사. 경민대 (前)교수· 도서관장. 국가유공자. (예)해병대위. 海幹 제34기 © 동부교차로저널

세상사(世上事)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책은 해당분야의 전문가(專門家)가 그 원인을 규명(糾明),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비전문가(非專門家)가 우연한 기회에 문제제기를 하여 그 원인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식물(植物)도 야간에 잠(휴식)을 자야 결실(結實-열매)을 맺게 되는데 빛이 비치면 잠을 못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과거 김포 농민이 문제제기를 하여 밝혀졌다.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이던 시절(인천공항 없던 시절) 김포공항으로부터 동쪽으로 등촌동까지 공항로(空港路) 양편은 모두 논, 밭이었다. 공항로 양쪽은 가로등이 야간에도 대낮같이 밝혀져 있었다.

그런데 공항로 옆에서 논농사[畓農(답농)]를 짓던 농부가 가로등 옆의 벼는 추수 때가 되어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푸르게 그대로 있는데 이것은 밤새도록 가로등을 켜놓았기 때문이라고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대해 초기에는 일반 여론 및 언론에서는 억지주장이라고 일축(一蹴)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험결과 “야간에 빛이 비치면 식물도 결실을 맺지 못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비전문가가 원인규명의 일등공신이 된 사례다.

필자(筆者, 조성국)는 음악전문가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조예(造詣)가 깊지 못하다. 그러나 노래방이 번창하므로 그에 관한 것과, 비가(悲歌)와 흥겨운 노래를 애창곡(愛唱曲)으로 선정했을 때의 결과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90년대 초반 일본의 가라오케[karaoke, ‘비어있는 오케스트라(Orchestra)’라는 뜻의 일본어 복합어-사람이 연주하는 대신 기계가 합성하는 반주음에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는 기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우리나라 노래방 문화의 효시(嚆矢)다.

90년대 초반부터 회식(會食) 자리 혹은 각종 모임이 끝나갈 때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 바로 노래방이었다. 이처럼 노래방 문화는 많은 단계를 거쳐 현재까지 발전해 왔다. 이런 노래방 문화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일본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가무공간(歌舞空間)이 대중화됨으로서 서민들의 생활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놀이문화의 변화는 음주문화의 관행마저도 변화시켜, 만취(滿醉)를 목적으로 즐기던 음주문화가 작금(昨今)에 와서는 적당한 음주 후 歌舞를 즐기는 노래방을 이용한 뒤풀이 문화로 안착(安着) 되었다.

평상시 또는 노래방이나 기타 가무장소(歌舞場所)에서 각자가 悲歌나 흥겨운 노래를 愛唱曲으로 정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筆者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 전 후에 국립 서울 현충원(서울 동작동)에 가서 호국영령들에게 참배할 때마다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悲歌와 인생의 단명(短命)은 어떤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漠然)한 생각을 해다.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면 즐거움이 오고, 悲歌를 애창곡으로 선정 자주 부르는 사람과 심리적으로 수심(愁心)이 있는 사람은 요절(夭折)하거나 비애(悲哀)를 맞게 될 개연성(蓋然性)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

筆者는 과거 청룡부대(해병대) 소총소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 최일선(最一線)에서 적과 싸우면서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서 슬픈 심정을 갖거나 悲歌를 愛唱曲으로 하는 장병들은 일찍 전사(戰死)하는 것을 보면서 이 부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관심을 갖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전투를 하면서 주변 상황으로 봐서 죽을 사람이 아닌데 죽고(임00 일병), 살기 어려운 사람인데 살아나는 것(孫00 중위)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사람은 운명(運命)이 있구나 하는 것과 평소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언가 비운(悲運)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이 싹트게 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의 사례(事例), 단편적 관찰

筆者가 소대장할 때 소대원이었던 金00 병장은 간단한 오락회를 할 때 애달픈 대사(臺詞)를 혼자 읊다가 悲歌를 부르는데 구성지게 잘했다. 즉 悲歌가 그의 愛唱曲이었다.

그는 전투 중에 부비트랩[booby trap-위장(僞裝) 폭발물 또는 덫]에 의해 다리와 등에 부상을 당했다.

필자가 소총중대, 소대장, 작전장교를 거쳐 부중대장이 되었을 때 金 병장과 車00 병장(필자가 소대장할 때 소대 통신병)을 함께 여단(旅團) 본부(부대 본부)에 파견근무를 시켜 생명에 대한 위험이 소총중대보다는 훨씬 적게 해주었다. 사실 필자의 권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명 중 金 병장은 총기(銃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尹00 해병소위(고려대학교 법대 졸)는 筆者의 군동기생(軍同期生)으로 월남전 참전 시, 필자와 다른 보병대대에서 소총소대장을 하였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각자 전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왕래를 할 수 없어서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그가 筆者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趙 소위! 지척이 천리인가 건너편의 어느 산만을 쳐다보며 거기 어디에 趙 소위가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며 멀지 않을 거리를 두고도 펜을 드네…. 우리네 생활에 아무런 고통은 없네, 있다면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라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의 내재적인 것이겠지. 우리 다소곳한 운명론자가 되어 보세….”

이 편지를 받고, 筆者의 마음마저 우울해 졌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면 어떤 예감이나 징조(徵兆)가 있는 것일까? 이 편지를 보내고, 필자의 회신을 받기 전에 그는 戰死하였다.

李00 해병대위(성균관대학교 법대 졸)도 필자의 軍同期生으로 해병 제1사단 항공대 조종사로 근무했다. 이 때 筆者는 그가 조종하는 경비행기를 타고,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경북 경주)을 돌아오는 등 이 대위와 필자는 둘이서 잘 어울려 다녔다. 그는 노래 중,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랑’을 부르면서 표정이 진지하고, 숙연해지곤 했다. 이 노래가 그의 愛唱曲이었다.

筆者는 그 노래를 부르는데 무슨 사연(事緣)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의심스러워 하루는 필자가 그에게 술을 사주면서, 잔뜩 취하게 해놓고, 말해보라고 채근(採根)했다. 그랬더니 중앙고등학교(서울) 다닐 때 여자 친구(여고생)와 해수욕장에 피서 갔다가 그 여자 친구가 익사(溺死)해서 그 때 잔영(殘影)이 머리 속에 남아 있다고, 실토(實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 후 그는 월남전(越南戰)에 참전(參戰), 군정찰기(L-19) 조종사로서 전투지역에서 정찰임무를 잘 수행하고 귀국하였다. 그 다음, 김포의 해병여단(현 사단)에 근무할 때 헬기를 조종하고 강화도(江華島) 상공을 저공비행하다가 그가 미처 전선(電線)을 보지 못해 헬기날개[回轉翼]에 전선이 걸려 바다에 추락, 동승했던 미군 대위와 함께 溺死하였다. 溺死문제로 고민하더니 결국 그도 溺死하고 말았다. 이들 3명은 모두 국립 서울 현충원(서울 동작동)에 안장(安葬) 되었다.

筆者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가수 차중락은, 월남전 당시 주월 한국군 위문공연을 여러 번 하였다. 그의 음성은 청승맞고, 남성이면서 여성 같은 음성으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등 주로 구슬픈 가요를 불렀는데 夭折하였다. 또 여가수 권혜경은 히트곡인 ‘산장의 여인’의 가사 내용인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 처럼 실제로 그런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6번 B단조 "비창(悲愴)"을 작곡하고, 초연되고 나서 9일 만에 사망하였다(1893년)고 한다.

KBS 2TV에서 2001. 7. 11. 23:00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을 방송했는데 제목이 '애창곡'이었다. 방송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가요계는 愛唱曲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묘한 속설(俗說)이 있다. 愛唱曲을 통해본 그들의 인생 역정.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는 슬픈 운명의 길을 걷고, 기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기쁜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는 미신(迷信) 같은 俗說이 있다."고 하였다.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는 夭折[비운]

1926년 여가수 윤심덕(당시 29세)은 자신의 죽음을 찬미하듯 ‘死의 찬미’를 부르고 그의 애인이자 극작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玄海灘)에 몸을 던져 투신자살 하였다.

가수 남인수는 ‘황성옛터’로 유명했고, “눈감아 드리리”를 마지막으로 1962년(44세) 실제로 눈을 감아 버렸다.

천재 가수로 칭송되는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 및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랑’ 등 히트곡을 많이 남겼다. 그의 노래는 대중들의 심금을 울려 뭇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는 노래 “마지막 잎새”를 끝으로 29세(1971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夭折한 가수 김정호는 “간다간다 나는 간다” 마치 장송곡(葬送曲) 분위기와 같은 노래 “님”을 부르고 34세(1985)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즐거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즐거운 일이 발생

송대관은 “쨍하고 해뜰 날 돌아 온단다.” 라는 내용의 노래 “해뜰 날”을 부르고 아직도 해가 질줄 모르고 있다.

윤항기(남자 가수ㆍ목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노래 “나는 행복합니다.”를 부른 후,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愛唱曲이 자신의 운명을 대변한 경우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의 애창곡은 ‘나그네 설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라는 내용의 이 노래를 그는 ‘야당가(野黨歌)’라고 부르기도 하며, 한 번도 여당(與黨) 생활을 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서 좋아했다고 한다.

김응룡 전 해태 호랑이 야구감독은 일평생 ‘목포의 눈물’ 외에는 다른 노래는 부른 적이 없다고 한다. 1990년 삼성 야구팀과의 Play-off 전에서 3년 패(敗)한 후 홀로 숙소에 앉아서 밤새도록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2001년 당시)은 삼성감독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愛唱曲은 나의 의지인 경우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애창곡은 ‘My way', 이 노래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의지를 많이 드러내 많이 불렀는데 3당 연합 후에는 愛唱曲을 ’만남‘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 재직시절에 애창곡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였다. 남북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서로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지 말자는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박찬호(야구 선수)의 愛唱曲은 자신만의 굳은 의지가 담긴 강산애의 ‘넌 할수 있어’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 초기에 어려웠던 일과 고비가 닥칠 때마다 ‘넌 할 수 있어’를 부르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동양인으로는 두 번째로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느냐에 따라 氣分뿐만 아니라 運命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흥겨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어떨까?"

筆者는 ‘비가와 슬픈 運命(또는 夭折)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 이 방송(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애창곡)을 시청하고는 어느 정도 개연성(蓋然性)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흥겨운 노래를 愛唱曲으로 선정하고, 가능하면 悲歌는 애창곡으로 선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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