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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소년에서 미 상원의원된 폴신신호범 박사, 하남 창성교회 특강

[하남] “하면 된다” “You can do”

11일 오후 2시 하남시 창성교회에서 특강에 나선 미 워싱턴주 상원의원이자 부의장인 폴신(Paull Shin, 한국명 신호범)박사가 강연을 통해서 참석자들과 자신에게 던진 강렬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이다.

   
 
▲ 미 워싱턴주 상원의원이자 부의장인 폴신(Paull Shin, 한국명 신호범)박사가 하남 창성교회 특강후 자신의 저서에 싸인을 해 주고 있는 모습
 
신호범 상원의원은 자신이 살아 온 험난 한 인생길과 그 길을 후회 없이 살아 온 자신의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 내면서 특강을 이어 나갔고, 특강을 듣는 강단 아래에서는 너무나 힘들었던 신호범 상원의원의 삶에 눈물을 흘렸으며, 뜨거운 감동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4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자신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려 고아가 된 신호범 상원의원은 깡통을 들고 한끼 식사를 구걸해야 했으며, 편안히 쉴 집과 가족이 없어 밤이면 다른 거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매서운 겨울 바람을 피해야만 했다.

 

깡통 들고 구걸생활

경기도 파주 금천이 고향인 신호범 상원의원(72)은, 4살 때 갑자기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아무도 돌 봐 주는 사람이 없어 어린 나이에 거리소년이 돼 깡통을 들고 구걸에 나서야 했다.

6살 때 서울로 올라와 서울역 일대에서 ‘동냥’을 하면서 생활해 나가는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15살 때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민들과 함께 걸어서 충남 예천까지 내려가 생활했다.

서울이 다시 수복됐다는 소문에 다시 걸어서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미국군인을 보고 배가 고파서 손을 내밀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처음 보는 그 미군은 어린 신호범씨를 트럭에 끌어 올린 후 가던 길을 계속갔다.

이 미군들이 도착한 곳은 임진강 건너 장단이라는 곳으로, 난생 처음으로 따뜻한 물에 온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 입은 후, 흔히들 말하는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생활

6-8명의 미군장교들의 구두를 딱고 온갖 잡다한 일을 해야 하는 하우스보이 생활이었지만 제대 밥 먹고 사람대우 받으며 살아가는 하루 하루였지만, 신박사의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밤 늦은 시간에 뒷 동산에 올라가 흐느껴 울고 있는데, 한 미군이 다가와서 “왜 우느냐?”고 물었고 “Go away !!”를 외치던 소년은 얼마 후 그 미군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군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풍족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내가 살아 온 인생은 너무 힘들었고 슬펐다”면서 자신의 살아 온 과정을 이야기하자, 그 미군은 넓은 가슴으로 어린 신호범 상원의원을 껴 안아 주면서 양아들로 삼겠다고 했다.

   
 
 

양 아버지가 된 그 미군의 이름(Ray Paull)과 자신의 한국이름을 따서 ‘Paull Shin’이라는 미국이름을 갖게 되고 미국생활이 시작됐다.

이날 강연에서 신호범 상원의원은 “트럭에서 나를 건져 올린 손은 주님의 손 이었으며, 울고 있는 나를 안아 준 양아버지의 포옹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에 건너 간 신호범 상원의원의 나이가 19살이 됐으므로 양아버지는 고등학교에 진학시켜려고 하자 신호범 상원의원은 자신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음을 알렸다.

그러자 양아버지는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나이가 많아서 안된다”는 초등학교 교장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입학해 보지 못한 신호범 상원의원은 검정고시를 통해 공부 하기로 마음먹고 대합입학 검정고시 시작 1년 4개월만에 이를 이뤄냈다.

 

하루 3시간 자고 미국 대입검정고시 합격

난생 처음인 영어와 영어로 된 수학, 물리들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하루 3시간만 잠을 잘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매일 코피가 났으며, 심지어는 얼굴에서 피가 나기도 하고 입술이 수 없이 터지기도 했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한 신호범 상원의원은, 브리감 영 대학에서 정치학에 이어 피츠버그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 석사 학위와 1974년에는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동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초, 징집에 의해서 군에 입대한 신호범 상원의원이 군동료 4명과 함께 한 식당에 들어 갔다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모멸과 함께 밖으로 내 쫓기는 경험을 한 후, 이러한 잘못된 법을 고치는 일을 해야 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있었다.

“진실한 꿈을 갖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뤄주고 가르쳐 주신다”며 자신의 확신을 전해 주는 신호범 상원의원은, 1984년 부터 부스 가드너(Booth Gardner) 전 주지사의 무역고문을 맡았고 1987년도에 가드너 주지사가 비행기 안에서 정치를 권유하자 5년간 신중히 고민하고 생각 한 끝에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출마한 곳은 백인이 90%이상 거주하는 곳이며,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지역으로 동양인으로 민주당 후보인 폴신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지역이었다.

 

미국 워싱턴주 하원의원 당선

그러나 10개월 동안 2만9천여 가구를 직접 찾아 다니면서 문을 두드리고 백인 유권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국에 와서 많은 신세와 도움을 받았다, 이제 내가 미국과 이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려고 한다.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폴신후보에 대해 유권자들은 “대화해 보니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뢰감이 간다”며 지지를 약속했다.

결과는 당선이었다. 공화당 우세지역에 26년 만에 민주당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낳아서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신호범 상원의원은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 되면서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아 나서, 영등포 인근에서 재혼해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 고생하며 생활하고 있는 이복동생 5명 모두를 미국으로 초청해 생활여건을 마련해 준 신 박사는 자신을 버리고 사라져 버려 고아생활을 해야 했던 아픈 가슴 때문에 아버지와의 갈등을 풀지 못하고 해를 보내고 있었다.

 

한 많은 아버지와의 화해와 용서

그러던 어느 해 아버지와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고 지냈던 놀랄만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왜 나를 버리고 떠나셨나요?”라는 신 박사의 질문에 “너희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집안이 가난해서 다른 동네에 머슴으로 팔려 가야 했다”는 아버지의 한 맺힌 사연이 터져 나왔으며 “호범아! 나를 용서해라!”라는 아버지의 말에 부자는 한 없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와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그 일 이후로 즉시 아버지를 미국으로 모셔, 4년간 함께 생활하고 난 후 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누구 보다도 험한 인생길을 살아오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뜻을 세워 온 신호범 상원의원은 말한다 “결심하면 된다”고......

“You can do”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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