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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김교영의 선조들은 모두 순교<3.1절 특집 3부작>애국자의 피 흐르는 가문(3)

아버지, 할아버지들 조국 사랑했던 천주교도인들
김성우 성인 등 '구산성지'서 아픔의 역사 간직

일제통치 시절 하남지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벌이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고 김교영 옹<특집 1부, 2부 참조>의 애국과 민족사랑은 그의 선조로부터 이어 받은 혈통에 있었다.
김교영 옹의 할아버지들이었던 김성우(성 안토니오), 김성만, 김성문은 조국발전과 개몽을 위한 천주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모두 순교를 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또, 김교영의 작은 할아버지인 김성문과 김성문의 아들 김경희 조카 김성희, 김차희는 같은 날 세상을 등졌던 역사 속에 있다.

   
  #김성우 안토니오가 잠들어 있는 곳
 
# 3형제 모두 순교
구산(龜山)마을은 당시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에 위치 해 뒤쪽 산이 거북을 닮았다 해 이름 지어졌다.
구산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곳에 마재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2백년 전 조선에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일 당시 주역이었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이 있던 곳.
이들 중 정약종의 아들 하상 바오로가 구산에 여러차례 들렀고 김성우와 세교가 많았다고 정약종의 5대 손인 정규선이 전하고 있다.
그렇게 교류를 하던 중 1839년(기해년)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자 구산에 살던 김성우의 사촌 김주집이 체포되고 뒤를 이어 김성만, 김성문, 김성우도 붙잡힌다.
이들은 외국 신부들에게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고 해 국사범으로 지목됐었다.
2년 후인 1841년 정월에 김성만이 광주 남한산성 감옥 안에서 추위와 굶주림,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고 같은 해 4월엔 김성우도 압송 된 한양 감옥에서 교살형을 받고 순교한다.
또, 1868년엔 지난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김성문도 남한산성에서 순교 해 김성우, 김성만, 김성문 3형제가 모두 순교하는 아픈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김성우는 천주교를 버리라는 독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주교인 임으로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한다"는 말을 남기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아들, 조카들도 모두 순교

   
  #김성우 성인
 
시간이 흐른 1866년(병인년) 또다시 천주교 대 박해가 일어나던 때에 김성우의 아들과 조카들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김성우의 아들 성희와 조카 차희, 경희 그리고 사촌아들 윤희 등이 체포되고 만 것.
이들 중 성희, 차희, 경희는 1868년 3월8일 한날에 광주 남한산성에서 같이 순교한다.
당시 이들은 참수가 아닌 백지살(白紙殺)을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백지살이란 백지로 얼굴을 덮고 물을 뿌려 질식사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김성우는 형제와 아들, 형제의 자녀들 등 모두 7명 가운데 6명이 천주교 박해에 따라 세상을 등지게 됐다.
다행이 화를 면한 김성만의 자녀인 원희는 하남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유공자가 된 김교영이라는 위대한 애국자 아들을 맞게 된 장본인이 된다.

 

#구산성지엔 순례자 줄이어
매년 셀 수 없이 많은 순례자들이 몰리는 하남시 망월동 구산성지는 아직도 이들을 잊지 않고 있다.
구산성지는 김성우 성인(聖人)의 고향이며 묘소가 있는 곳으로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년간 간직하고 있는 평화와 은혜가 가득한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하남시 망월동 구산성지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김성만, 김성문, 김성희, 최지현, 김경희, 심칠여, 김차희, 김윤희 등 8명의 순교자를 기릴 수 있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는 현재의 교인들은 "구산성지는 단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믿음의 승리를 침묵으로 일깨워 주는 복음의 증언대가 되는 곳"이라 말한다.
또, 성지를 안내하는 글에는 "우리 몸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반짝이던 순교선열들의 용기와 열정, 사랑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은 얼마나 힘이되고 자랑스러운가"라고 적고 있다.
<끝>

# 3.1절 특집 3부작 중 2부 '해방연도 정확히 예언했던 김정룡씨' 제하의 기사<본지 3월1일 9면 보도> 중 옥살이 중 고문에 의해 해방 때부터 두 다리가 마비됐다는 부분을 해방 때부터가 아닌 해방 후 7~8년이 지난 싯점부터 후유증에 의해 앉은뱅이 생활을 했다로 정정합니다.
 

 

이규웅 기자  aa5767@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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