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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예언했던 김정룡씨<3.1절 특집 3부작>만세운동 선봉에 섰던 선조들(2)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고문... 평생 앉은뱅이로
만주와 이북, 하남지역서 광복위한 투사로 활약

올해로 88회째의 3.1절을 맞아 서슬퍼렇던 일제통지시절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아낌없이 한 몸을 바쳤던 우리들의 선조를 되돌아 본다.
하남(당시 광주)지역에선 수많은 군중이 거리로 뛰쳐나와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운동 만세를 외쳤고 당시 만세시위의 선봉엔 고 김교영 옹 있었다.<연재 1부작 본지 2월15일 9면 보도>
김교영 옹은 하남 구산지역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만세군중을 연일 이끌며 일제의 총칼에도 두려움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옥살이 끝에 후유증으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의 아들 역시 남양주와 양평 등지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의 앞잡이들에게 모진 수난을 겪었다.
교차로저널은 3.1절 특집 2부작으로 김교영 옹의 할아버지로 천주교 박해 당시 순교당했던 김성문의 증손자인 김정룡씨를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본다.

   
  #1958년 김정운씨 일가
 
#소 스무마리, 새 세마리
김정룡(1897-1974)씨는 일제통치가 시작되자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만주로 발을 옮긴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국광복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당찬 결심이었다.
그곳에서 조국을 위해 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조국광복을 염원하는 투사들과 힘든 나날들을 보낸다.
때에 따라선 만주와 이북지역을 오가며 용감하고도 대담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다 1945년 봄, 김정룡씨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형사에 의해 전격 체포되고 그때부터 모진 고통의 시간이 계속된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후손들 (김학철, 최창규, 김윤식, 김학진, 김학령씨 <좌측부터>)
 
김정룡씨는 경찰에 체포될 당시만 해도 왜 자신이 체포를 당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경찰 조사 과정에서 김정룡씨는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됐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유언비어라 함은 김정룡씨가 "소 스무마리에 새 세마리"라는 말을 군중 일반에 퍼트렸다는 것.
일제도 긴장하게 했던 소 스무마리에 새 세마리는 사실 엄청난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소 스무마리는 소화20년을 일컫는 말로 1945년을 뜻한다.
또, 새 세마리는 새 세상이 온다는 뜻으로 이 말을 풀이하면 1945년에 대한민국의 광복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그 예언은 적중 해 우리나라는 1945년 8월에 한 맺힌 일제통치를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된 김정룡씨는 홍원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고 광복이 있던 1945년 8월까지 옥살이는 계속된다.
해방과 함께 옥살이는 끝났지만 모진 고문은 김정룡씨의 두 발을 마비시켜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야만 했다.
구산지역의 사람들은 김정룡씨는 '앉은뱅이 할아버지'라 불렀고 지금도 하남시 망월동 등지에선 '앉은뱅이 할아버지'의 인생이 회자되고 있다.
만세운동을 벌였던 김정운씨의 손자인 김학령씨는 "마을사람들은 단순하게 앉은뱅이 할아버지라 불렀지만 걷지 못해 비닐로 다리를 묶고 다녀야 했던 김정룡씨의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며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지만 평생을 불구로 살며 고통받았던 김정룡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고 회상한다.

 

#당시 상황 책으로 만들어 져
하남시 구산지역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경주김씨 계림군(鷄林君)파의 자손들은 한권의 책을 만들어 당시 상황을 세세하게 남겼다.
지난 1995년 2월에 완성 된 김경식씨가 저술 한 '구산'이 바로 그 책이다.
총 70여 페이지에 달하는 '구산'에는 한가족 4명을 포함 해 6명이 천주교 박해에 의해 순교 당했던 사실과 구산지역에서의 왕성한 독립운동 활동 등이 적혀있다.
김경식씨는 책에서 만세운동을 하던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놀란 왜병들이 총을 마구 쏘며 달려들고 시위대가 흩어졌지만 선봉에 있던 김교영은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조카사위 권명규와 조카 김정운도 체포됐다"
이날 체포됐던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거꾸로 메달리기도 하고 물 고문,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 끼기, 비틀기 등 온갖 고문을 무려 1주일동안 받는다.
또, 권명규와 김정운은 곤장 60대를 맞기도 했고 김교영씨는 서울로 압송 돼 고통의 시간을 더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김경식씨가 3.1운동 당시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과 3.1운동에 참여했던 김정순(1892-1980)과 김정운(1892-1972), 김봉회(1902-김교영의 자부) 등의 증언을 토대로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규웅 기자  aa5767@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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