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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농군학교' 창설 50주년개화운동가 故 김용기 장로의 생애

높은 이상으로 황무지 개간해서 옥토로
자서전 '나의 한길 60년'에 나타난 생애

일제시대 민족적인 개화운동가이자 국권회복운동가인 故 일가 김용기 장로가 설립한 가나안 농군학교(Canaan Farmer's School)가 11월 17일로 창설  50주년을 맞이 했으며, 지난 13일 오후 2시 30분에는 '가나안 창설 50주년 기념예배 및 세미나'를 개최했다.

교차로저널에서는 가나안의 창설자이신 고 김용기 장로의 높은 뜻과 고귀한 일생을 기억하고, 50년을 맞은 가나안농군학교 설립 배경을 고 김용기 장로의 마지막 자서전인 '나의 한길 60년' (저자 김용기/ 발행인 여운학/ 발행처 규장문화사/ 1980년 5.25일 초판발행)을 통해서 함께 생각 하고자 합니다.

 

   
▲ 1920년대 촬영된 고 김용기 장로의 20대때 사진으로 사진뒤 나무에 <조국이여 안심허라>라는 팻말을 달고 동지인 여운혁씨와 서있는 모습(사진 왼편이 김용기 장로)
<저자 서문>
일제시대 개척 제1보를 내디딘 봉안 이상촌의 개척으로부터 신림땅 제5개척에 이르기까지 45년간에 걸친 내 평생의 개척사업이 소위 성공리에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과 일개 가정의 미약한 힘 만으로 가나안 농군학교의 문을 연지 ○○○에 16만명이라는 많은 교육생을 배출했다는 기적적인 사실이 어찌 인간 김용기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크고 뚜렷하신 하나님의 돌보심 앞에 감사와 경외의 찬미만 있을 뿐이다.

내 나이 올해로 예순 일곱이니 내가 철들기 시작한 일곱살 때부터 따지면 꼭 60년 동안을 오직 한길 그분의 말씀 따라 살아온 길을 꾸밈없이 보임으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 이 책을 쓰게 됐다.

<출생과 소년기>
▷1912년 9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5형제중 넷째로 태어남.
▷7살때 일어난 3.1만세 운동에 직접 참가해서 '독립만세'를 외침.
▷19살때 연암 박지원 선생이 쓴 '열하일기'에 나온 우리나라의 옛 영토에 관한 기록에 "...우리 옛 조선과 고구려의 국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등과 역사공부를 한 후, 중국 대륙을 지배한다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집을 가출해서 중국 봉천으로 이동.
▷봉천교회 이성낙 목사의 지혜로운 설득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되 돌아 옴.
▷자신을 뒤 돌아 보고 깊은 묵상을 하기 위해 20살 되던 해에 강화도 마니산을 찾아서 40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하고, 한편으로는 내 자신을 깨달은 중대한 계기가 됐다.

<아버지의 유산-농사꾼이 되라>
▷아버지는 평소 내게 늘 당신의 신념을 강조 하셨다.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경우, 지식인들은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 몇자 배우게 되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도시로 나가 출세를 꿈꾼다. 그러니, 농촌은 날이 갈수록 황폐하고 퇴락해 가게 마련이다. 이대로 간다면 일본에 빼앗긴 건 두말할 것도 없고, 농토마저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배운 사람들이 농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일생의 목표를 '농사꾼'으로 결정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30분간 새벽예배를 보고 일터로 나가 해가 지고 어두워 질 때 까지 일해서 2년만에 마을에서 가장 농사 잘 짓는 농사꾼으로 인정 받음.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제창한 '모범 이상촌' 건설계획과 이승훈 선생의 '오산학교', 심훈의 '상록수'등에 영향을 받아 '모범 이상촌' 건립을 계획했으나 자금마련에 어려움을 느껴서, 몇가지 장사를 해서 3천5백원이라는 거금을 모았으나, 거액을 벌 수 있다는 금광업자의 꾐에 빠져 모두 날려버림.
▷남한산성 분원의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서 몸뚱이를 담보로 4백원을 빌려서 봉안의 비탈진 산 3천평을 1평당 3전에 매입해서 온 몸을 아끼지 않고 개간해서 4년만에 10배가 넘는 금액인 1천 2백원에 서울사람에게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버려진 땅 4천평을 구입해서 '봉안 이상촌' 건립에 본격적으로 착수 했으며, 뜻이 통하는 동지들의 10가정이 합류함.

   
▲ 설립 50주년을 맞은 가나안농군학교의 현 모습

<제1개척시대 - 일제하에서의 봉안 이상촌>
▷1930년대에 만들기 시작한 '봉안 이상촌'의 특기할 만한 기본원칙은 '협동조합 운영' '소비조합 운영' '공제상호조합' '농촌 유년교육' '농촌 소년교육' '농촌 청년교육' '청년회의 활동'등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봉안 이상촌에서 생활하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신사참배 거부와 독립운동하는 젊은이들을 숨겨주는 장소를 제공하고, '창씨 개명' 과 '공출 거부'를 생명을 걸고 지켜 나갔다.

<광복 전후>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1942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오갈 데가 없이 일제의 핍박을 받자 자진해서 몽양 선생을 봉안 이상촌에 모시고 옴.
▷"남쪽의 미군도, 불쪽의 소련군도 모두 물러가라!"는 성명서를 내건 당시 '농민동맹'의 일원으로 미 군정으로부터 체포돼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여운형, 신익희, 김규식, 정구영 선생등의 연서로 미 군정장관 하지에 의해서 13일만에 풀려남.

<제2개척 시대>
▷평소 존경하던 이상백 선생께서 "오늘날 진짜 애국.독립운동은 농촌을 부흥시키는데 있다"는 말씀에 따라 서울 자하문 밖 세검정 구기리의 버려진 땅 1만여평을 매입해 '삼각산 농장'을 세움.
이후 "한국이 필요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농사꾼'을 양성하고 정신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 3년간 개간해온 삼각산 농장을 처분하고 6.25 전쟁을 겪다.

<제3개척 시대>
▷애지중지하며 온 정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성장시켜 왔던 '봉안 이상촌'이 6.25때 비행기의 폭격으로 한줌 재가 되어 버리자, 전쟁중이던 1952년 3월,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에 버려지 황무지 6만평을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으나, 자금이 없었다.
당시 신당동 신일교회의 강태국 목사를 찾아가 '에덴향(鄕)' 개척을 설명하고 공동투자를 이끌어 냈으며,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40여명의 청년동지들이 나를 따라 나섰다.
나의 세번째 개척지인 '에덴향'에서는 처음으로 '용인 복음고등농민학원'을 시작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용인 군수였던 유인상씨가 에덴향을 방문하고 난 후 감동을 받아, 용인군에 보급하도록 지시했던 '에덴향의 생활헌장'은 다음과 같다.

(온겨레가 요구하는 인물)
1. 한마디의 말이 약속어음으로 대용되는 인물이 되자.
2. 의지가 돌 같이 굳고 무거워서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마음이 요동치 않는 인물이 되자.
3. 무슨 일이든지 연구와 의견을 가지고 발전하여 나가는 인물이 되자.
4. 작은 일에도 큰 사건과 같이 충성스럽게 실행하는 인물이 되자.
5. 자기 자신을 위한 야심이 아니고, 인류와 사회와 남을 위하여 큰 포부로서 봉사하려는 마음이 불 타오르는 인물이 되자.
6. 용기와 과단성에 적극성을 가진 인물이 되자.
7.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기회를 민첩하게 붙들어서 자기가 할 일을 유감없이 행하는 인물이 되자.

(우리 겨레는 이때 이렇게 살자)
1. 음식 한끼에 반드시 4시간씩 일하고 먹자.
2. 버는 재주 없거든 쓰는 재주도 없도록 하자.
3. 억지로 못 살지 말고 억지로 잘 살도록 하자.
4. 물질과 권력과 지식과 기술을 바로 쓸 줄 아는 국민이 되자.
5. 육체의 잠이 깊이 들면 물질의 도적을 맞게 되고, 민족 사상의 잠이 깊이 들면 영토와 주권을 도적맞게 되고, 심령의 잠이 깊으면 영혼이 멸망케 된다.

<제4개척 시대>
1954년 11월 16일 일곱식구의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황산)의 새 개척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것이 가나안 농군학교의 시초로 그러나, 처음부터 농군학교를 계획한 건 아니었다.

이곳의 땅이 얼마나 척박했으면 대한민국 굴지의 벽돌공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겠는가?

황산에서 생활하는 우리 가정은 1만평을 개간하는데 5○○○ 계획을 세워서 착실히 땅에 땀을 쏟기 시작했다.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
이 과정에서 가나안농군학교가 세워지게 됐는데, 나는 농사 짓는 틈틈히 전국 여러곳을 다니면서 여러가지 내용의 강연을 하게 됐으며, 년수로는 30년동안에 총 3천회의 강연을 하게됐으며,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내가 생활하는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시작한게 가나안농군학교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세 아들과 두딸과 두 며누리가 교사가 되어 점차 전국에서 모여드는 교육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육은 실 생활속에서 조금도 꾸밈새 없이 가르치는 산 교육으로 큰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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