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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찰산성과 축성과 함께 새로 창건

   
산성축조와 건축물 설립 부역에는 대개 승군이 동원되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새로 창건한 7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찰이다.

남한산성의 역사에서는 1624년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자 인조 3년 승도청을 두고 '각성'이라는 조선시대를 승려를 도총섭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해 사역을 돕게 했다고 전한다.

또, 승군의 숙식을 위해 전부터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 외에 1638년 개원사와 한흥사, 국청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 등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된 사찰이 장경사로 모두 9개의 사찰에 승군을 머물게 하면서 훈련과 수도방위에 만전을 기했다.

장경사는 대종의 모 장경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장경사란 이름이 붙여졌다 전한다. 사찰의 규모는 대단히 크다. 그 이유는 대종이 친히 가서 내린 도승이 1천여명에 이르렀기에 총 1천130칸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은 장경사 뿐이다.

장경사는 축성 뒤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수성에 필요한 승군의 훈련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을 교체하며 항상 주인을 바꾸며 번승을 상주하게 했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된 3칸 동향 건물로 합각지붕·팔작집이라고도 한다. 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끝은 우진각지붕과 같다. 맞배지붕과 함께 한식 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이며 요사채 3동과 진남루·칠성각·대방 등이 있다.

한편 도총섭으로 사찰창건을 주관한 '각성(1575-1660)'이라는 인물의 승려는 충북 보은 출생으로 9세에 아버지를 잃자 출가할 뜻을 품고 '선수'가 화산에 들어오자 계속 그 밑에서 수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에 참가하였고, 1612년 스승인 선수가 광승의 무고로 화를 입자 그도 감옥에 갇혔으나, 광해군이 친국하다 그의 위의에 감복하여 오히려 하사품을 내려 방면하면서 판선교도총섭의 직함을 내렸다.

1615년 스승이 죽자 지리산 ·태백산 등에 은거하였고,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그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위를 주어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성을 쌓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3년 후에 완공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라는 호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강인호 기자  kai76@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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