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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즐거움"하남시 춘궁동 출신 조성국 교수(출향인사-3)

   
▲ 고골초등학교 1~2학년은 광주향교내 명륜당이 교실이었다.
"지금의 고골초등학교는 50년 전에는 하남서부국민학교 고골분교였는데, 학교가 채 준비가 안돼서 인근 광주향교의 명륜당에서 국민학교 1,2학년을 다니다가 학교건물이 다 지어지고 난 후에야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지요"

하남시 춘궁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에서 태어나 학자의 길을 걷고있는 조성국 교수(64. 법학박사.경민대학 부동산경영학과)가 모처럼 찾은 학교운동장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다.

"마을 뒷산인 금암산을 오르내리면서 맑은 물속의 가재잡기와 나무열매를 따먹던 어린시절 기억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고 할 정도로 조용한 유년기를 거친 춘궁동 궁안마을의 착한 소년은 덕수상고와 한양대 법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근무 하던 중 청룡부대 소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주월 한국군 전투사상 신화를 남긴 '짜빈동대첩'후 부대교대로 짜빈동 일대에서 대소작전에 참가 하는등 생과사의 얇은 종이장 차이를 직접 경험하게 됐고,  이때 수첩 2권 분량에 꼼꼼히 기록한 전투수기가 2백자 원고지 300매로 정리,  동아일보사의 논픽션우수작으로 선정돼서 '나의 월남전 참전'이라는 제목으로 신동아에 게재돼 생생한 감동과 함께 전쟁의 비극과 비 인간성에 대해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 고골초등학교 1기생이었던 조교수와 동창생들이 심은 학교운동장의 나무로 지금은 3그루만 남아있다.
"직접 전쟁을 겪어보니 죽고 사는 것은 운에 달렸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조하는 조교수는 월남전에서만 수없이 많은 죽음문턱을 밟았다.

"소대장인 나의 뒤를 따르는 병사가 방금 내가 지나온 길에서 지뢰를 밟고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상황과,  바로 뒤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입고있던 방탄조끼가 벌집이 되는 상황에서도 생명을 건질수 있는 미스터리와 같은 순간, 베트콩의 저격에서 살아남은 믿기지 않은 실화등..."

이러한 사연등으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최선을 다한 후에 하늘의 명을 기다리자"는 이 말은 인간의 한계로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체험한 조교수에게는 가슴깊이 와 닿은 말 이었다.

이후 제대와 함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서 사법고시에 도전하기도 했으며,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서울특별시위원회 근무를 시작으로 국제인권단체등에서 상당한 기간을 보내기도 했다.

올해 95세인 조교수의 어머니는 아직도 춘궁동 본가에서 생존해 계시며, 큰형님도 하남에 살고있어서 하남에 대한 조교수의 애정은 남 다르다.

"농경시대에서 산업화로 사회가 변화 하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축사로 허가 받아서 임대수입을 위해 창고로 사용되는 불법축사들이 너무 무계획적으로 허가돼서 하남시가 난개발로 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있다"면서 지금의 하남시의 개발형태에 대해서 걱정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특히 고골지역은 하남위례성지역으로 확실시 되는 곳으로, 하남시 전체가 유물.유적이 산재한 역사 깊은 곳 이므로 이를 잘 보존하고 개발해서 하남시만의 특화된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자신들의 조상인 백제에 대한 인물과 이야기와 연결되는 이유로, 일본학자들의 백제에 대한 연구와 발표자료는 한국보다 월등히 많고 방대하다"면서 "이러한 백제역사의 중심지인 하남시 역사와 유적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등한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며,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백제의 옛 수도를 체계적으로 발굴하면 수많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근본 뿌리를 찾아서 반드시 하남으로 올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었다.

얼마전 동국대교수의 글을 보니 "일본의 신사에 모신 신(神)의 이름중에 '춘궁의 신'이 있다고 했다" "하남시 춘궁동을 떠 올리면 뭔가 잡히는게 있지 않는가?"

   
▲ 고골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미끄럼틀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조성국교수
고골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인 조교수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은 모두 90여명이다. 그때는 시대가 어수선 하고 먹고 살기 어려운 때 인지라, 같은 학년이지만 5~6살 연령차가 나는 동창생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매 분기마다 한번씩 초등학교 동창생 모임이 있지만 요즘은 잘 참석을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지만 33년전에 고골지역 12개 자연마을의 '청소년 축구대회'를 처음 제안해서 15년간 성장시켜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금은 고골잔치등이 개최되고 있으나 당시만해도 반목과 질시로 가득했던 시절이었는데 '청소년 축구대회'를 몇 년동안 온힘을 다해서 최선을 다했더니 이후에는 마을축제로 변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로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어려서 어머니는 어린 조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복이 오른팔에 있으니, 글을 많이 써야 한다" 그 어머니의 말대로 어린 아들은 성장해서 자신이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학자가 되었고 막대동생인 조성민씨도 한양대 법대교수로 재직중에 있다.

   
▲ 고골초등학교 설립에 공이 큰 '안용환님 추모비'의 비문앞에 선 조성국교수. 이 비문은 조교수가 직접 썼다.
조교수는 학자가 누리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고있다.  "혼자 책을 읽고 그 속에 있는 보석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이런 자료들을  수집해서 책을 만들어 낼 때의 기쁨과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교수의 저서는 총 6권으로 한양조씨 족보와 1996년의 '부동산감정평가론' 1999년의 '생활법률상담' 2001년의 '법학개론' 2002년의 부동산 사법(민법및민사특별법), 2003년의 '생활법률-이론과 사례' 등이다.

일찍이 배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체득한 것들로 욕심을 부리지 않다 보니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10분동안 걷고-10분간 뛰고(자신의 체력에 맞게)-10분간 걷기를 수십년간 계속 한다는 조교수의 건강은 매우 좋은편이다.

고향의 후배들과 청소년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묻자 "노력은 하지않고 하늘의 뜻만 기다리는 것은 안되고, 자가기 목표를 세웠으면 최대한 노력을 하고 난 후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공원 기자  lee@k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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